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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하연 Apr 24. 2024

누구나 <질투 버튼>은 있다.

잔잔한 파도가 갑자기 사나워졌다. 대화 중, 나도 모르는 사이 감정이 요동쳤다. 상대는 아무 잘못도 없었다. 나 혼자, 북 치고 장구를 쳤다. 이유는 질투 버튼이 눌러졌기 때문이었다.

그날의 대화는 유쾌했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인사이트를 나눠 주는 인플루언서였다. 특유의 밝음과 총명함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조언들을 해 주었다. 그러던 중 최근 출판사 5곳에서 연락이 왔고, 어떤 출판사와 계약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화사했던 내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나는 날마다 글을 쓰고, 투고를 하는 중이었다. 완성된 원고는 2, 3개로 쌓여 있었지만, 출판사의 벽을 넘기 어려웠다. 도전하고, 실패하고의 반복이었다. 그동안, 스스로를 다독이며 노력했지만, 최근에는 노력들에 피드백이 없어 무력감이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의 행복한 고민을 듣게 되었다. 그는 내가 이런 상황에 있는지도 몰랐으며, 여전히 친절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날마다 글을 쓰면서 공들이지 않아도, 유명하면 출판사에서 연락이 오는구나.”


꽈배기처럼 베베꼬인 생각을 하는 내가 놀랍고 실망스러웠다. 사실, 유명해지기가 더 어렵고, 그 유명함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감정이 요동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어서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심술궂은 나를 외면하고 싶었다. 그래서 모임이 끝나자마자 급하게 자리를 떠났다. 그 후에도 질투하는 마음은 오래갔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혼자 받은 상처를 자가치료 하는데 2주가 걸렸다.     


많은 대화에서, 각자의 질투 버튼을 만날 때가 있다. 워킹맘인 J는 아이의 밥을 잘 차려주는 인스타 속 많은 엄마들에게 질투를 느꼈다. 책방 모임을 운영하는 O는 다른 독서모임의 ‘솔드아웃’에 마음이 쓰였다. 회사원 Y는 동료들의 학벌이 좋다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살았다. 동시에 회사 동료의 부모님이 선생님이라서 말을 잘한다고 했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은 그가 자주 반응하는 말이었고, 본인의 질투 버튼이기도 했다. 질투 버튼은 사람으로 인해 눌리기도 하지만, 어떤 환경에 놓이기만 해도 작동되었다.      

“이 동네는 아이 없으면 살기 힘든 동네예요. 봄이 되면 특히 더 그래요. 산책길에 유모차를 끌고 나오는 엄마들도 많고, 카페에만 가도 아이 엄마들이 가득해요. 아이가 없는 나는 이 동네에서 무쓸모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사람은 자기가 놓인 환경 안에서만 사고하는 존재라는 생각도 들었다. 비출산으로 지향한  50대의 고백은 특별한 말이 아닌, 환경만으로도 질투버튼이 눌릴 수 있다는 걸 알게 했다.      


인간은 모두 결핍이 있고, 그 결핍은 피해 갈 수 없다. 사람을 만나지 않거나, 산책을 하지 않는다면 질투 버튼이 눌릴 일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 동물로서 늘 누군가와 함께 한다. 결핍을 안고 사람들을 만난다. 모두 같은 조건 속에 살지 않기 때문에 만남이 즐겁기도 하지만, 상처가 되기도 한다. 상대의 결핍을 모르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 또 받기도 한다.      


질투 버튼을 없앨 수는 없을까? 없앨 수는 없지만, 관심을 다른 곳으로 옮길 방법은 있다.

첫째, 나의 질투 버튼을 솔직하게 말한다. 그것만으로도 상대가 나를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다. 다음 대화에서 그 부분을 피하며 대화하면 질투 버튼이 눌릴 일이 없다. (다만 첫 만남은 제외)

둘째, 스스로 결핍을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면 상대(이유도 모르는)를 미워하기보다는 나를 아는 기회가 되고, 질투를 연하게 희석하는 노력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 지금 글을 쓰는 과정에 의미를 부여한다.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쓰는 날을 기특하게 여기려고 노력하면 된다.

셋째, 질투 버튼 옆에 흡족 버튼 하나를 만든다. 질투 버튼이 눌리는 건 내 몫이 아니지만, 흡족 버튼은 내가 언제든 누를 수 있다. 그렇게 감정의 평온함을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살다 보면 질투 버튼이 사정없이 눌릴 때가 있다. 그때, 나를 무방비 상태로 두지 말자. 지금의 나를 책망하기보다는 개별적인 존재로 인정하며 다독이자. 흡족 버튼을 많이 만들어 누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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