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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Mar 31. 2016

피콜로와 콘트라베이스

음악 에세이 14 - 최상의 자리는 내가 있어야 하는 자리다.


“피콜로는 어디 갔나?”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일화다. 한 지휘자가 최종 리허설에서 음악이 클라이맥스에 이를 때 피콜로 소리가 들리지 않자 연주를 멈추고 이렇게 소리쳤다는 것이다.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구성하는 악기 중 가장 작은 악기인 피콜로 연주자는 자신의 소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어 연주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음향 속에서도 피콜로 소리가 빠진 것을 감지한 지휘자의 위대함과 자신의 일을 작고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 소홀히 한 피콜로 연주자의 경솔함을 말할 때 흔히 인용된다. 그렇지만 음악을 아는 이들은 이 일화에 쉽게 수긍하기 어렵다. 결정적인 순간에 피콜로의 소리가 얼마나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지를 아는 까닭이다. 고음의 피콜로는 오케스트라 전체를 고양시킨다.

   

그렇다면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큰 악기인 콘트라베이스의 경우는 어떠할까? 소설가 파트리스 쥐스킨트는 그의 작품 <콘트라베이스>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는 언제나 뒤에 앉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렇게 유지될 겁니다. 그러나 저는 불평하지 않습니다. 현실주의자인 저는 제가 발을 어디에다 뻗어야 되는지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요. 제가 어디쯤에 소속된 사람인지는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미 다 배워서 알고 있다고요......!”

   

소설 속 주인공인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음악 분야의 불공정한 점을 한탄한다. 연주가 끝난 후에 박수갈채는 지휘자와 독주자들이 독차지하고, 오케스트라의 다른 연주자들 역시 많은 박수를 받지만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들은 마치 그들의 그림자처럼 존재한다. 오케스트라의 변방 악기인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인 그는 처음부터 콘트라베이스로 시작한 사람은 절대 없으며, 우연과 실망이라는 과정을 통해 콘트라베이스 연주자가 된다고 자조한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이런 자괴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단장이 만약 콘트라베이스가 없으면 마치 옷을 걸치지 않은 황제로 전락해 버리고 말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자신이 연주하는 바이올린으로 그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으며 콘트라베이스가 오케스트라의 중추적인 악기라고 강조한다. 이러한 자부심 또한 그에게는 있는 것이다. 콘트라베이스는 오케스트라에 벨벳 카펫을 깔아준다. 가장 낮은 저음의 콘트라베이스가 받쳐 주어야 오케스트라는 단단하게 선다.   

   

사실 악기의 음역이나 크기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악기가 오케스트라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도 중대한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내는 소리를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것은 문제가 된다. 하찮다고 생각해서 자신을 방치하는 순간 전체 화음과 조화는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모두가 지휘자나 독주자가 될 수 없고, 모두가 앞줄에 앉을 수도 없다. 가장 높은 곳이 최고의 자리가 아니며 가장 낮은 곳이 최악의 자리도 아니다. 최상의 자리는 자신이 반드시 있어야 할 그 자리이다.

   

음악회를 같이 준비하는 친구가 연주 며칠 전에 이렇게 말했다. “이 연주회가 음악계에 길이 남을 연주회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벌거나 사람들이 대단하게 알아주는 음악회도 아닌데... 나는 이 연주회 때문에 하루 종일 심각하게 죽네 사네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혼자 우습기도 해.” 나는 “그러게... 나도 웃어도 웃는 게 아니야”라고 대답하며 그날 어머니가 보내주신 메시지를 친구와 나누었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지나면 꽃 피고 새 우는 따뜻한 봄이 온다 하지만 우리 딸은 너무 힘들어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해... 그렇지만 아무나 음악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 너를 보면 네 일들이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알게 돼. 그건 큰 일들인 거야. 알지? 봄을 배경으로 울리는 피아노 소리가 환상적이야.”

   

어떤 이는 최고만이 살아남는 음악계에서 경쟁력이 없으면 음악을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오케스트라에는 다양한 악기와 연주자들이 필요하다. 악장과 수석들만으로는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악기를 만들 수 없다. 피아노에도 88개의 건반 모두가 필요하다. 많이 치지 않는 음을 뺀 피아노에서 연주를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 반주는 주선율을 살려준다. 연결구는 주제와 주제 사이의 필연적인 이음새가 된다. 그리고 쉼표는 음악을 숨 쉬게 한다.

   

모두가 주목받을 수는 없지만 허술해도 되는 부분 역시 없다. 피콜로가 비상하지 못하면 오케스트라 전체가 가라앉고 콘트라베이스가 거칠면 오케스트라는 울퉁불퉁한 자갈길 위에서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음악이 가능하거든요. 그렇게 이곳에서 저곳으로, 혹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어지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음악적으로 의미가 있는 모든 것들이 생성되어 비로소 음악적 의미와 삶이, 분명히 강조해서 말씀드리지만 삶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 속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음악을 하는 삶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자신만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지만, 자신이 조연이라고 해서 대충 하는 것은 기만이다. 그 자신에게만큼은 자신의 악기가 전부이며 자신의 삶에서만큼은 주연이기 때문이다.


한 연주회에서 누구보다도 빛나는 얼굴과 열정적인 몸짓으로 연주했던 마지막 줄의 바이올린 연주자의 모습과, 오랜 기다림 끝에 클라이맥스에서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로 흥겹게 트라이앵글을 쳤던 노연주자의 얼굴이 겹쳐서 떠오른다.


시선이 멈추는 곳에 있는 그들은 더 이상 조연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줄 줄 아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감동의 중심에 바로 그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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