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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Mar 31. 2016

무소르그스키 <전람회의 그림>

음악 에세이 15  우정은 함께 예찬하는 것이다.

십여 년 전의 일이다. 한 연주회에서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들었다. 라벨의 관현악 편곡이었다. 그날 연주는 벅차리만큼 훌륭했다. 그 시절에는 늘 연주회를 혼자 다녔다. 그 감동을 오롯이 홀로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겼다. 연주회의 여운을 음미하며 길을 걷고 있었는데, 앞에서 가던 남자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했다. “방금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을 들었는데, 연주 정말 굉장했어!” 그는 자신이 받은 감동을 나누지 않고는,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나 보다.


그때 나는 갑자기 일종의 결핍을 느꼈다. 나 역시 감동을 나눌 누군가가 필요했던 것일까.     

   

“예찬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떤 아름다운 음악가, 한 마리 우아한 말, 어떤 장엄한 풍경, 심지어 지옥처럼 웅장한 공포 앞에서 완전히 손들어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참한 사람이다. 그와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다. 우정은 함께 예찬하는 가운데서만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한계, 모자람, 왜소함은 눈앞으로 밀어닥치는 숭고함 속에서 치유될 수 있다.”


(미셸 투르니에, <예찬> 서문 中)

           

한 사람이 가진 창조성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까지는 여러 요소가 적절히 조화돼야 한다. 줄탁동시라는 말이 있다.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려면 밖에서 어미 닭이 쪼는 것과 안에서 병아리가 쪼는 것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일이 순조롭게 진행됨을 뜻한다. 창조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열정과 함께 다양한 자극이 필요하다. 이러한 것이 지속된다면 그의 창조성은 비로소 완전히 꽃을 피울 수 있다. 많은 예술가의 경우에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이들과의 만남이 위대한 작품 창작의 결정타가 되었다.

   

무소르그스키 역시 음악적 이상을 공유하는 이들과 함께 걸출한 작곡가로 성장해갔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그는 17세 때 다르고미슈스키, 퀴, 발라키예프, 보로딘, 그리고 스타소프 등을 만나 음악적인 교류를 하게 됐다. 20대 중반에는 몇 명의 음악가들이 모인 공동체에 가입해 작품 창작에 몰입했는데, 이들은 늘 함께 창작한 작품들을 연주하고 열띤 토론을 했다. 


소르그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좀 더 깊이 있는 예술적 교류를 하기 위해 방을 함께 쓰기도 했다. 보로딘은 이후에 두 사람의 음악적 기량이 훨씬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이들 음악가들과의 접촉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도록 무소르그스키를 강하게 자극했다. 동시에 ‘강력한 소수’로 알려진 러시아 5인조를 비롯한 예술가들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그는 자신의 지경을 확장해갔다.   

   

무소르그스키의 가장 독창적인 피아노 음악으로 평가받는 <전람회의 그림>은 친구 하르트만과의 우정 속에서 탄생했다. 무소르그스키는 건축가이자 화가인 빅토르 하르트만을 ‘러시아 5인조’의 이론적 지지자인 평론가 스타소프를 통해 알게 됐다. 무소르그스키와 하르트만은 열정적인 민족주의자라는 동질감을 기반으로 더욱 각별한 사이로 발전했다. 또한 이 두 사람은 누구와도 구별되는 독창적인 창조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무소르그스키는 ‘러시아 5인조’ 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개성을 지닌 작곡가였다. 그는 자신의 음악에 대한 가치와 확신이 분명했다. 제도권의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전통적인 관습에서 그를 자유롭게 했다. 선법적인 성격을 지닌 선율은 러시아의 민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리듬 역시 러시아 민속 음악의 영향을 보여준다. 특별히 그는 화성적인 측면에서 가장 혁명적인 작곡가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대담하면서도 진보적인 그의 화성은 거칠고 투박하게까지 느껴진다.

   

무소르그스키를 매혹시켰던 하르트만 역시 스타소프로부터 ‘천재성의 원천’이라는 찬탄을 받을 만큼 천부적인 재능과 개성을 지닌 예술가였다. 이반 크람스코이는 하르트만에 대해 “그는 건축가가 아니라 예술가, 그것도 그 방면에서 가장 환상적인 예술가로 보인다... 그에게 진부하고 실용적인 건물을 지으라고 했다면 그는 실패했을 것이다. 그는 전례 없는 동화의 성, 환상적인 궁전 등을 만들었고 바로 여기에서 그는 진정으로 훌륭한 것들을 창조할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다. 무소르그스키와 하르트만은 서로에게 필요한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으며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지나치게 짧았다. 약 4년간의 교제 후에 하르트만이 1873년, 그의 나이 39세 때 동맥류 파열로 요절한 것이다. 무소르그스키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이 무슨 끔찍한 일이란 말입니까! 개나 말, 쥐 같은 것들도 생명이 있는데 왜 하르트만 같은 사람이 죽어야 한단 말입니까!” 그는 죽음을 앞둔 하르트만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숨 쉬기 힘들어하는 하르트만에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매우 침통해했다. 하르트만이 죽은 후에 그의 죽음을 애도한 그의 친구들은 1874년에 추모 전시회를 개최했는데, 여기에서는 그림 4백 여점, 건축 설계 스케치, 의상, 무대 배경 등의 스케치 등이 전시되었다.

   

무소르그스키는 이 전시회에 다녀온 후 절망적인 슬픔을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켰다. 전시회에서 받은 영감과 인상을 10곡의 피아노 연작인 ‘전람회의 그림’으로 창작한 것이다. 하르트만은 죽어서도 그에게 강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는 작품으로 이 우정을 완성했다. 이 작품의 독특한 점은 ‘프롬나드’라고 하는 간주곡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산책이라는 뜻을 지닌 이 악구는 하르트만의 작품과 작품 사이를 거니는 작곡자 자신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서로 예찬하는 가운데 생긴 이들의 우정은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 무소르그스키는 하르트만의 작품을 음악으로 그리며 그를 기렸으며, 프롬나드를 통해 자신의 걸음과 심경의 변화를 뛰어나게 묘사했다. 그는 이 의미심장한 작품으로 친구의 죽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는 제1곡 ‘난쟁이’, 제2곡 ‘고성’, 제3곡 ‘튈리르 궁전’ 등을 지나고 제8곡 ‘카타콤’의 묘지를 지난 후에 마지막 10곡에서 웅장한 ‘키예프의 대문’에 이른다. 깊은 교감을 나누던 친구를 상실한 후 그는 새로운 문 앞에 선다. 그리고 투르니에의 말처럼, 인간의 “한계, 모자람, 왜소함”에서 벗어나 그는 “눈앞으로 밀어닥치는 숭고함 속에서 치유”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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