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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Mar 31. 2017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

음악에세이27 - 격조 높은 기품과 젊음의 생동감이 충만한 작품


고독한 길을 걷는 천재는 드물지 않다. 시대와의 불화, 열악한 환경은 외골수 천재와 쉽게 어울리는 조합이다. 결핍과 고통이 불행한 천재의 창작력의 원천이라는 말은 새롭지 않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면 어떠한가? “돈이란 제6감과 같은 것이어서, 이것이 없이는 다른 오감도 충분히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서머셋 모옴의 말이다. 경제적 안정은 정신적 여유를 창출하는 단단한 기반이 된다. 명문가 태생의 멘델스존은 부족함이 없는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게다가 그는 모차르트에 비견되는 천재였다. 멘델스존은 평생 음악사에 남는 명작들을 많이 남겼다. 그중에서도 ‘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는 음악적 가치와 풍성한 내용으로 그의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멘델스존     

 

멘델스존은 부와 명성과 교양, 이 모든 것을 갖춘 가문 태생이었다. 할아버지 모제스 멘델스존은 존경받는 계몽주의 사상가였으며, 아버지는 함부르크의 명망 있는 은행가였다. 음악적 감수성이 풍부한 어머니는 멘델스존의 첫 번째 음악 선생님이기도 했다. 이후에 멘델스존은 칼 프리드리히 첼터에게 훌륭한 음악교육을 받았다. 멘델스존과 평생 각별한 사랑을 나눈 누이 파니 멘델스존은 멘델스존처럼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멘델스존의 집에서는 끊임없이 연주회가 열렸으며, 그 중심에 그가 있었다. 가족들의 따뜻한 시선과 지지 속에서 멘델스존은 주목받는 음악가로 성장해갔다. 그는 돈과 명예를 얻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시달릴 필요가 없던 신동이었다. 스승인 첼터는 대문호 괴테의 친구이기도 했는데, 괴테는 대부분의 이들이 그랬듯이 어린 멘델스존에게 완전히 사로잡혔다.     


멘델스존의 교육을 위해 괴테에게 보냈던 그의 부모는 청년 멘델스존의 음악적 성장을 위한 여행 또한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멘델스존은 3년여간 이탈리아, 영국, 스코틀랜드, 스위스와 파리 등을 거치며 자신의 음악세계를 더욱 풍성하게 가꾸었다. 그가 여행 중에 받은 영감과 감동은 그의 작품 창작으로 결실을 맺었다. 화가 수준의 뛰어난 그림 실력을 지녔던 그는 이러한 풍경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문학적, 회화적 상상력은 그의 음악에서 그 진수를 보여준다.

  

멘델스존이 누린 문화적 혜택과 특별한 사랑은 그를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만들었다. 그의 음악에 흐르는 유연함과 우아함, 섬세함으로 때로 그는 유약한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멘델스존은 자신의 음악적 신념을 펼치는 데 쉽게 뜻을 굽히지 않는 강직함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전 시대의 유산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그의 음악은 격정을 나타내되 결코 견고한 중심을 잃지 않는다. 그의 작품이 지닌 균형감과 형식미 또한 그가 이어받은 고전주의의 유산의 산물이다.  


 그는 위대한 작곡가였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지휘자이기도 했다. 특별히 그는 바흐와 헨델, 베토벤과 슈베르트, 슈만 등, 전시대와 동시대의 위대한 고전 작품들을 연주하는데 열정적이었다. 그의 이러한 헌신으로 바흐의 <마태 수난곡>은 세상에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슈베르트의 교향곡 제9번과 슈만의 교향곡 제1번의 초연을 지휘한 것도 멘델스존이었다. 그에게는 불멸의 가치를 지닌 작품을 감지하고 인식하는 뛰어난 안목과 식견이 있었다. 작곡가와 지휘자로서, 또한 음악 행정가로서 그는 자신의 일을 탁월하게 해냈다. 멘델스존은 1835년에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됐다.   

  


작품의 탄생     


이 작품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페르디난드 데이비드를 위해 작곡됐다. 데이비드는 멘델스존의 오랜 친구였다. 멘델스존보다 한 살 어린 데이비드 역시 멘델스존과 같은 음악 신동이었다. 십대 때 이미 독주자로서 데뷔를 한 데이비드와의 첫 만남 이후로 두 사람은 평생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인간적인 친밀함속에서 음악적 공감대가 있었다. 게반트하우스의 지휘자가 된 멘델스존은 1836년에 데이비드를 악장으로 지명했다. 데이비드는 후에 멘델스존이 창설한 라이프치히 음악원의 바이올린 과장이 되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의 긴밀한 교류는 이 바이올린 협주곡의 탄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1838년 여름에 멘델스존은 데이비드에게 그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나는 이번 겨울에는 당신을 위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쓰고 싶습니다. 그것은 e단조의 작품으로 구상중인데, 도입부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멘델스존은 당대 최고의 음악행정가로서 숨 쉴 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작품은 좀처럼 진척되지 못했다.  

   

이 작품이 완성된 것은 처음 구상한 때부터 6년 후인 1844년이었다. 멘델스존은 그 해 7월에 가족들과 프랑크푸르트 근처의 소덴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었고, 오랫동안 미루어두었던 바이올린 협주곡을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데이비드는 멘델스존에게 바이올린 파트와 카덴차에 대한 열정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이 작품은 착상에서 완성까지 무려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이렇게 한 작품 창작에 긴 시간이 걸린 것은 멘델스존에게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결과, 이 협주곡은 명작을 만들기 위한 멘델스존의 특별한 공력이 담겨 있는 작품으로 탄생했다.      

   


작품에 대해서         


이 e단조 협주곡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3개의 악장이 중단 없이 연주된다는 것이다. 즉 일반적인 협주곡에서 악장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있는 것과 달리 이 협주곡은 전 악장이 연속적으로 전개된다. 각 악장은 독립적인 성격을 지니면서도 통일성을 성취해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작품은 처음부터 놀라움을 선사한다. 소나타 형식의 제1악장에서 오케스트라의 총주라는 말이 무색하게 작고 단순한 한 마디 반의 반주 후에 바로 독주 바이올린이 첫 주제를 제시한다. 협주곡에서 오케스트라의 제시나 전주가 없는 파격을 선보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작품의 서정적인 주제가 가지는 즉각적인 호소력은 이러한 표현이 관습에의 정면 도전이라기보다는 음악적인 참신함으로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시작은 작품의 심장부로 곧바로 들어가는 듯한 효과를 준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혁신은 카덴차에 있다. 흔히 1악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등장해 독주자의 기교와 음악성을 발휘하는 카덴차가 이 협주곡에서는 발전부의 끝부분에 위치한다. 따라서 이 카덴차는 악장 전체의 극적인 마침을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재현부로 이어진다. 카덴차가 끝날 무렵 독주 바이올린이 점차 소리를 줄이면서 오케스트라가 제1주제 선율을 연주하는 재현부는 인상적인 순간을 만든다. 한편 멘델스존은 카덴차를 연주자의 재량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카덴차를 직접 작곡해 악보에 기입했다. 이 협주곡의 카덴차의 위치와 음악적 내용은 작품의 낭만적인 성격을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멘델스존의 최고의 걸작품이자 낭만주의 협주곡의 최고봉인 이 작품은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 혁신적인 곡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작품 안에서 세련된 균형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매우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 실험적이거나 파격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낭만적인 감수성을 가장 아름답게 드러내기 위한 필연적이며 자연스러운 결과물인 듯이 여겨지는 것이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이 가진 혁신적인 성격은 이후 브루흐, 랄로, 생상, 드보르작, 시벨리우스 등의 낭만주의 바이올린 협주곡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멘델스존의 유산     


하이든은 궁정 하인의 신분이었으며, 바흐는 교회에 소속된 작곡가였다. 모차르트는 프리랜서 작곡가의 삶을 꿈꾸었으나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고, 베토벤은 최초로 독립적인 작곡가로서의 삶을 살기 위해 투쟁했다. 멘델스존과 같은 시대에 활동한 독학으로 공부한 천재 베를리오즈는 평생 파산 상태에 시달렸다. 생활고에 시달렸던 작곡가들을 일일이 열거하려면 음악사에 기록된 작곡가들의 이름을 거의 대부분 다시 호명해야 할 정도이다. 

   

이에 반해 멘델스존은 명망 있는 집안의 자녀였다. 그의 재력과 교양은 음악가들의 훌륭한 후견인 역할을 하기에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잊혀진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부활시키고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창설하는 등의 활동만으로도 그는 중대한 음악적 업적을 남겼다고도 할 수 있다. 당대 최고의 음악행정가였던 멘델스존은 또한 당시 가장 성공한 작곡가이기도 했다. 

   

가장 위대한 생존 작곡가로 인정받던 작곡가의 말년은 그러나 지나치게 빨리 찾아왔다.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했던가? 평생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과업에 시달리던 그는 사랑하는 누이의 죽음으로 심신이 약해져 38세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불행히도 멘델스존은 강한 심력까지 소유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멘델스존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가 모차르트 이후 가장 위대한 음악의 천재였으며, 가장 사랑스러운 인간이라고 표현했다. 누구보다도 풍부한 정신적, 물질적 유산을 물려받았던 멘델스존은 그에게 주어진 특혜를 헛되이 하지 않았다. 그가 남긴 300여 곡에 이르는 풍성한 음악 유산이 그것을 증명한다. 비록 음악적으로 멘델스존을 직접적으로 계승한 작곡가는 그다지 많지 않을지라도, 그가 발굴한 위대한 음악 유산이 후대에 준 영향력은 막강한 것이었다. 

   





작곡가의 이른 말년에 탄생한 이 바이올린의 협주곡에는 격조 높은 기품과 함께 젊음의 생동감과 생명력이 충만하다. 풍성한 음악적 내용과 함께 오케스트라와 독주 바이올린이 조화로운 균형을 이루면서도 독주 바이올린의 활약이 두드러진 이 작품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가 더해가는 명작임에 틀림없다. 이 작품은 지극한 행복감을 선사한다. 그 이름처럼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감탄과 사랑을 넘치도록 받았던 행운아(Felix) 작곡가였던 멘델스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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