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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지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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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스 서 Mar 09. 2018

슈만의 환상소곡집

음악에세이29 - "제가 느끼는 모든 것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환상과 현실     


“아무리 생각해도 실제 사랑보다 음악 속에서 느끼는 사랑이 더 좋은 것 같다.” 언젠가 슈만의 음악을 듣다가 한 친구가 이렇게 고백했다. 음악에서 표현하는 사랑은 아름다움이라는 옷을 덧입는다. 이 시대에는 낭만적인 사랑을 하기 어렵다고들 말한다. 쉽게 지불할 수 없는 가격이 매겨진 명품을 욕망하는 것이 더 쉬워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위해 삶을 지불하도록 부추기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속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사랑과 같은 가치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풍요와 편리함 속에서 우리의 상상력은 점차 결핍된다.

   

꿈이 있는 자만이 환상을 품는다. 환상이 사라지면 메마른 현실만이 남는다. 환상을 가능케 하는 가장 큰 원동력 중 하나가 사랑이다. 꿈과 사랑, 환상은 현실을 가리는 안개가 아니라 현실을 견디고 그것을 극복하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운명의 여인인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 교수로부터 이별을 강요당한 슈만은 오랜 고뇌와 고통의 시간을 겪었다. 그때 그는 그가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의 모든 생각과 감정을 음악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환상과 현실의 간극 속에서 그는 작곡을 했다. 이 <환상소곡집>(Fantasiestücke Op.12)은 비크 교수의 반대로 클라라와의 관계가 순탄하지 않았을 때 작곡된 작품이다. 

   

슈만이 어머니의 뜻과 경제적인 이유로 법률가의 길을 가려고 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스무 살의 슈만은 음악가의 길을 가기로 결단하고 어머니에게 이렇게 편지한다. “나의 미래가 투쟁과 돈 문제와 연관된 그런 지독한 구태의연한 관습에 얽매여야만 합니까? 그리고 내가 이런 사람들과 계속적으로 관계를 맺어야만 합니까? 내가 거기에서 얻는 것은 무엇인가요?” 슈만은 편지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법속에서 가난하고 불행하게 살기보다는 음악 안에서 가난하고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그는 이 결단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 가난한 무명의 음악가로서 이미 유럽 음악계의 주목을 받는 피아니스트였던 클라라 비크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클라라의 아버지인 비크 교수가 보기에 슈만은 장래와 정신과 일상 모두가 불안정한 젊은이에 불과했다. 클라라를 얻기 위한 슈만의 사랑은 비크 교수와의 길고 고통스러운 법적 투쟁으로 이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슈만은 사랑 때문에 법정에 서게 됐다. 그가 처한 상황만큼이나 복잡한 내면을 가졌던 슈만은 클라라와의 사랑의 여정에서 수많은 작품을 쏟아냈다. 

   

슈만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세상의 모든 일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제가 느끼는 모든 것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는 남다른 감수성과 개성을 지니고 자신의 영혼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작곡가였다. 슈만은 클라라와 떨어져 있을 때에는 그녀를 갈망하며 작품을 통해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으며, 클라라와의 사랑을 이루었을 때는 충만한 기쁨과 환희를 노래했다. 그에게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현실 자체보다도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으로 느껴졌으리라. 슈만의 작품에는 사랑하는 연인들이 겪을 수 있는 터질 듯한 열정과 깨어지기 쉬운 연약함이 실제보다 더 증폭되거나 더 세밀하게 표현된다. 이것이 그가 가진 독특한 감수성이다. 그의 음악은 사랑에 관한 무수한 감정을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     

  

 자신의 미래가 구태의연한 관습에 얽매이기 싫다고 패기 넘치게 말했던 슈만은 스물넷의 나이에 1834년에 <음악신보>를 발간했다. 이것은 슈만이 만든 가상의 인물들인 ‘다윗 동맹원’들의 공식 발표의 장이었다. 이 다윗 동맹원들은 고루한 통념을 주장하는 자들과 싸우기 위해 연합한 이들이다. 이 동맹은 열정적이고 투쟁적인 플로레스탄과 서정적이고 몽상적인 오이제비우스, 그리고 이 둘을 중재하는 스승인 라로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는 원래 한 사람으로, 양면성을 가진 인물이다. 그리고 라로는 슈만의 스승이자 클라라의 아버지인 비크 교수를 모델로 했다. 이외에도 다른 많은 음악가들도 다윗 동맹원의 일원으로 이 잡지에 등장했다. 

   

다윗 동맹원들은 시적인 것을 이상적인 것으로 지향하면서, 외면적 기교에만 치우친 진부한 필리스틴에 대항해 투쟁한다. 비록 이것은 상상속의 투쟁이지만 슈만은 이를 통해 그가 속한 실제 음악 세계를 개혁하고자 했다. 슈만은 진보적이고 외향적인 플로레스탄이 되기도 하고 내향적이며 시적인 오이제비우스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그는 극적인 긴장감을 끝내 견디지 못하고 환상과 환청에 굴복하기 전까지 그의 작품 속에 이원화된 자아를 투영했다. 그의 창작물은 그의 처절한 외적, 내적 투쟁 끝에 탄생한 산물인 것이다. 슈만의 <환상소곡집>에는 이러한 그의 이중적인 자화상이 잘 드러나 있다.

   

 

 성격 소곡     

   

시적인 음악을 음악의 이상으로 삼았던 슈만에게 자신의 심상을 표현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성격 소곡은 웅대한 작품보다 적합한 장르였다. 그의 성격 소곡 속에서 대상에 대한 다양한 상념들이 변화무쌍하게 펼쳐진다. 이러한 변화는 때로는 지나치게 변덕스럽게까지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렇지만 슈만만큼 미묘한 정서의 변화에서 무한한 표현의 가능성을 탐구한 작곡가도 흔치 않다. 

   

성격 소곡이란 특정한 분위기나 심리를 묘사한 음악적 시로, 표제가 붙는 짧은 기악곡이다. 이들은 대개 모음곡의 형태로 묶여 있다. 그렇지만 슈만은 표제의 단순한 묘사에 그치는 표제음악적인 성격을 거부한다. 그가 작품에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구체적인 설명이 아니라 시적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모호함이다. 짧으면서도 응축된 감정을 표현하기에 성격 소곡은 효과적인 매체였다. 가곡 분야에서 그가 이룬 성과도 그가 가지고 있는 음악적 성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특별히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을 한 1840년은 ‘가곡의 해’로 불릴 만큼 폭발적으로 가곡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슈만의 중요한 피아노 작품들은 대개가 1840년 이전에 작곡되었다. 1840년까지 출판된 슈만의 작품 op.1-23까지는 모두 피아노 작품으로, 몇 곡을 제외하고는 <나비> Op.2, <사육제> Op.9, <어린이 정경> Op.15, <크라이슬레리아나> Op.16 등 성격 소곡으로 이루어진 모음곡 형태로 작곡되었다. <환상소곡집> 역시 성격 소곡에 속하는 모음곡으로, 시적인 환상이 8개의 소품 속에 섬세하면서도 정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환상소곡집     


 환상소곡집은 피아노로 시적인 세계를 구축한 슈만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1837년에 작곡되었으며, 작품을 이루고 있는 8개의 곡은 각각 시적인 표제를 가지고 있다. 다양한 영감을 표현하는 소곡들을 모은 이 작품에 붙인 ‘Fantasiestücke’라는 용어는 E. T. A. 호프만의 소설인 ‘칼롯 수법에 의한 환상소곡집(Fantasiestücke in Callot’s Manier)’에서 따온 것이다. 

   

이 작품은 모음곡의 형식이지만 <나비>나 <사육제>처럼 전체를 통일시키는 음악적 동기를 가진 작품과 다르게, 각각의 곡이 독립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따로 발췌해서 연주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도 통일적인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즉 제6곡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내림표(♭)의 조성을 사용하고 있으며, 2부, 3부 형식 등 비교적 단순한 구조 속에서 서정적이며 농밀한 감수성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작품은 제1곡 ‘저녁에’(Des Abends), 제2곡 ‘비상’(Aufschwung), 제3곡 ‘왜?’ (Warum?), 제4곡 ‘변덕’(Grillen), 제5곡 ‘밤에’(In der Nacht), 제6곡 ‘우화’(Fabel), 제7곡 ‘얽힌 꿈’(Traumes Wirren), 제8곡 ‘노래의 끝’(Ende von Lied)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곡은 다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제1곡 ‘저녁에’는 조용하고 서정적인 곡으로,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친밀한 감정으로 연주하라는 지시가 있다. 전체적으로 교차 리듬과 박자의 개념을 모호하게 하는 잔잔한 진행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사색적이고 몽상적인 오이제비우스적인 성격이 잘 드러나 있는 곡이다. 제2곡 ‘비상’은 독립적으로 자주 연주되는 작품으로, 첫 곡과 대조적으로 아주 빠른 템포로 활기차게 진행된다. 외향적이고 격렬한 플로레스탄적인 성격이 나타나며 하늘을 비상하는 듯한 힘찬 도약 음형이 특징적이다. 

   

제3곡 ‘왜?’는 느리고 농밀한 작품으로, 애타게 질문을 하는 듯한 동기가 여러 성부에서 나타나지만 명확한 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하염없이 깊은 상념에 빠지는 듯하다. 유머를 가지고 연주하라는 지시어가 있는 제4곡 ‘변덕’은 플로레스탄적인 분위기로 경쾌하게 시작해서 중간부에는 사색에 잠긴 듯한 오이제비우스적인 부분이 나타난다. 제5곡 ‘밤에’는 정열적인 분위기로 펼쳐진다. 슈만은 클라라에게 이 곡을 연주할 때마다 매일 밤마다 바다를 헤엄쳐 사랑하는 사람이 횃불을 들고 기다리고 있는 등대까지 갔다가 아쉬움을 간직한 채 이별하는 헤로와 레안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고 편지했다. 밤바다의 파도가 몰아치는 듯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선율과 리듬이 극적인 긴장감을 자아낸다. 

   

제6곡 ‘우화’는 전 8곡 중 유일하게 조표가 없는 작품으로, 짧고 느린 서주 후에 쉴 새 없이 빠르게 진행된다. 변덕스러우면서도 즉흥적인 분위기가 생생하게 살아있다. 아주 활기차게 진행되는 제7곡 ‘얽힌 꿈’은 고도로 정교한 기교가 필요한 작품이다. 이 곡에서도 슈만은 플로레스탄적인 성격과 오이제비우스적인 성격을 효과적으로 대조했다. 마지막 8곡 ‘노래의 끝’은 활달하게 시작한 후에 마지막 코다에 이르러서는 갑자기 분위기가 침울하게 가라앉는다. 슈만은 클라라에게 쓴 편지에서 이 작품이 즐거운 결혼식을 표현했지만 끝 부분에서는 다시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살아나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했다. 이처럼 환상소곡집에서 슈만은 다양한 현실과 환상,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의 사이를 오가는 극적인 대비를 하나의 큰 흐름 안에서 자유롭게 표현했다.            





   


예술하는 삶을 벚꽃 나무를 마당에 심어놓는 것과 같다고 비유를 들은 적이 있다. 봄 한철 짧은 순간 흐드러지게 피는 벚꽃을 보기 위해서 나머지 계절에 꽃 없는 커다란 벚꽃나무를 두는 것이라고. 모든 것이 풍요로울 수 없다면 어느 것의 풍요로움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그 선택에는 무엇을 풍요롭게 여기는가 하는 가치의 문제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낭만주의의 화신 슈만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다 끝내 삶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삶을 마무리했다. 예술과 인생의 조화는 예술의 길을 걷는 이들이 풀어야 하는 숙제로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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