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여행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에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니까요.”
“소크라테스는...”, 혹은 “니체는...”이라고 거창하게 시작하면 좋은 글이 아니라고 한다. ‘삼시 세끼’라는 정겨운 이름의 식당에서 선생님들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번 여행에 빨간 머리 앤의 말이 떠올라서 다행이다.
평창에서 진행된 2024년 여름 세미나 겸 여행에 전인평 선생님, 문성모 선생님 외 7명이 참여했다.
하마터면 나는 출발조차 못할 뻔했다. 출발 당일 여유롭게 시간을 잡고 청량리로 향하는 전철을 타러 버스를 탔다. 하필 버스 기사님은 달리려는 의지가 거의 없는 한없이 느긋한 분이었다. 그분의 여유로움에 비례해 내 시간은 촉박해졌다. 그날 내 출발지는 청량리역까지 2시간이 훌쩍 넘는 장소였고 다음 전철은 30분 후였다. 전철을 놓치면 여행은 시작도 못하고 끝날 판이었다. 적당히 기대했던 여행이 기는 버스에서 엄청나게 간절해졌다. 튕기듯 내려 급행열차 달리는 속도로 뛰었다. 전철과 동시에 승강장에 도착했다. 놓칠 뻔한 1박 2일, 매 순간을 새기리라 새삼 다짐했다.
이제는 추억으로 남을 여행이 되었다. 소박하고 다정한 순간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간의 세미나를 통해서 음악계에서 크고 많은 일들을 이루신 선생님들의 훌륭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1박 2일간 함께 먹고 마시고 다니며 보게 된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모습들은 잔잔한 감동과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작은 배낭을 뒤에 맨 전인평 선생님은 가장 큰 어른이셨지만 가장 소년 같으셨다. 식사 전에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기도하시는 모습에서는 밥과 삶의 가치가 귀하게 드러났다. 아침 산책하러 나가기 위해 거실에서 아이처럼 곤히 잠드신 선생님 앞을 미소와 함께 살금살금 지나던 순간도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대관령 양떼 목장에서 양몰이 개를 부드럽게 어루만지시고 양들에게 살뜰히 건초를 주시던 문성모 선생님의 모습에서 그분이 얼마나 자신의 제자와 성도들에게 지극정성이었을지 짐작되었다. 수박을 사실 때는 음악가답게 음으로 분별하셨다. 통통 두드려 ‘도’ 음을 내는 수박을 고르셨다. 달콤한 수박을 먹는 내내 모두 유쾌했다. 긴 하루 끝 무렵 세미나에서는 두 분이 발표하셨다. 누구보다도 피곤하실 법도 한데 가장 먼저 책상에 앉아서 기다리시던 두 분의 모습도 세미나 내용만큼 인상적이었다.
여행 기간 동안 문성모 선생님과 인연이 깊은, 봉평에 계시는 이양일 목사님께서 차로 안내하셨다. 우리는 시원한 계곡에서 발 담그며 먹을 과일을 사러 봉평전통시장에 갔다. 신선들이나 먹었음직한 환상적인 복숭아를 산 것까지는 좋았는데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기 시작했다. 금세 그치겠거니 하고 계곡으로 향하는 길에 비는 폭우가 되었다. 이미 있던 관광객들도 서둘러 떠나고 있었다. 계곡뿐 아니라 하늘과 길도 물로 가득했다. 능숙하게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우리의 차는 흡사 급류 타는 후름라이드가 됐다. 계획했던 소소한 계곡 나들이가 긴장감 있는 모험으로 변모했다.
세상이 흠뻑 젖었다.
여름휴가의 절정, 피서지로 유명하다는 흥정계곡에 우리만 남았다. 계곡에는 내려갈 엄두도 못 내고 계곡에 면해 있는 식당에서 닭백숙과 닭도리탕을 먹으며 아쉬움과 허기를 달랬다. 식사를 마칠 무렵 고요히 해가 비치기 시작했다. 끌리듯 한 사람씩 계곡으로 향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옅게 퍼져있었고, 공중에는 물안개가 가득 피어있었다. 부드러운 빛이 겹겹이 쌓인 산등성을 감싸고 맑은 계곡물은 이 모든 것을 품었다. 우리는 깊어진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신비롭게 펼쳐지는 풍경을 온몸으로 흡수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이 시간이 평생에 남을 특별한 순간이 될 것을 예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