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섭한 일? 그녀가 짜 놓은 음모? 부침가루 한 봉지에 웬 실력까지. 주부 경력이 얼마인데 그런 황당한 질문을 던지나 싶다. 다섯 음절이다. 그녀는 대체 그 다섯 음절 안에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스물여섯 해 전, 그때도 다섯 음절이었다. 단지 그녀가 아닌 어머님이었을 뿐. 그래도 그 다섯 음절은 충분히 이해되고 남았다.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며느리가 결혼 한 달 만에 아들 회사 동료들 집들이를 한다니 얼마나 걱정이 많았을지. 그날 애타는 어머님 전화만 족히 스무 통은 되었을 것이다. 따르릉 소리만 나면 마늘을 찧다가도, 양파를 썰다가도, 손이 양념 범벅이어도 전화기 앞으로 부리나케 달려가기 바빴다.
‘할 줄은 아나?’, ‘넉넉히 해라’로 시작된 염려 섞인 다섯 음절. 남편이 생각보다 음식을 잘한다며 어머님에게 걱정 말라고 이야기해도 나보다 한 살 아래인, 결혼 안 한 막내 시누이까지 든든한 지원군으로 올려 보냈다.
외동딸로 자라 무얼 해봤겠냐고 처음부터 탐탁찮게 여겼던 어머님이다. 신혼여행 다녀온 후 서울로 올라가던 날, 열 가지 넘는 밑반찬을 바리바리 사 주며 ‘밥은 해봤나?’라고 근심스런 표정으로 쳐다보던 어머님이니 그 조바심이 오죽했을까.
집들이 하던 날, 든든한 지원군 막내 시누이는 소개팅이 잡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나가버렸고. 그 바람에 우왕좌왕 헤매기도 했지만 일주일 전부터 준비해 둔 덕분에 집들이를 나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었다. 이후 아버님, 어머님 생신 상차림을 거치며 손은 늦어도 차긑차근 잘한다는 칭찬도 받은 나였건만.
그녀의 마트에서 산, 죄 없는 부침가루를 한참동안 째려본다. 얼굴에 음식 못함이라고 쓰인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지. 내 나이가 몇인데, 주부로 산 세월이 몇 년인데 아무렴 그 정도도 못할까.
그녀의 황당한 질문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주부라면 웬만큼 할 줄 아는, 이를테면 닭볶음탕이나 잡채를 한다고 하면 ‘그런 것도 할 줄 아세요?’, ‘다시 봐야겠네.’라고 말한 적도 있다. 음식솜씨는 영 아니게 생겼는데 뜻밖이라는 식이다. 차라리 그때 그깟 요리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사람을 뭘 보고 함부로 판단 하냐며 쐐기라도 박을 것을. 그랬다면 굴욕적인 다섯 음절은 듣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달랑 부침가루 하나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 불 보듯 뻔한데 ‘그걸로 뭐 하시게요?’라고 굵은 하이 톤으로 또록또록 묻는다. 이쯤 되면 다음 질문이 무엇일지 의심을 했어야 했건만 순간적 방심에 ‘부침개 구우려고요.’라고 순하게 말해버렸다. 그 끝에 가차 없이 이어지는 그녀의 하이 톤 다섯 음절 ‘실력 되세요?’
자로 재고 자른 듯 똑똑 끊어지는 다섯 음절. 부침가루로 부침개를 굽는 것은 당연하고 부침개 역시 거창한 실력을 요구하는 음식도 아닌데. 식탁 위에 말없이 기대고 있는 부침가루가 낱낱이 해부할 것처럼 자신을 째려보지 말고 증명이라도 해 보이라며 배를 내민 채 거만하게 웃고 있다.
증명, 그 생각을 하니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증명해 보인 적이 없다. 까다롭고 별난 성질이라고 소문난 그녀지만 맛난 것 있으면 여기저기 퍼주기 좋아해 얻어먹은 것도 많은데 십여 년 넘는 세월 동안 나는 왜 그리 야박하게 굴었는지. 갓 담은 김장김치에 여름날 오이소박이며 시골에서 갖고 온 된장도 넉넉히 퍼준 인심 후한 그녀건만. 고작 그녀 아들 좋아하는 피자나 치킨 몇 번 사 준 게 다였지, 내 손으로 만든 음식 맛 한번 보라며 다정스레 건네 본 적이 없다.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 한구석 슬그머니 미안함이 올라온다.
아니면 두 아이 중고등학교 시절, 그녀 가게에서 사흘이 멀다고 샀던 김밥 재료들이 눈덩이처럼 부피를 늘려 ‘저 사람은 김밥 이외 다른 것은 못 함’이라고 그녀 머릿속에 박아둔 것인지 모른다. 학교 가느라 바쁜 아침에 오가며 하나씩 먹으라고 말아둔 김밥인데 몇 줄 더 말아 그녀에게도 가져다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두둑한 부침가루마냥 인심이라도 후했다면 그 말은 듣지 않았을 것을.
증명을 요구하는 부침가루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냉장고로 걸음을 옮겼다. 사 둔 지 며칠 된, 끝이 누렇게 시든 쪽파 한 단과 줄무늬 애호박이 희생할 각오 되어 있으니 맘껏 해 보이라며 달려드는데 여전히 거만하게 기대고 앉은 부침가루 한 봉지.
녀석을 뜯어 양푼에 우르르 쏟아 부었다. 보란 듯 휘날리는 허연 가루, 수런거리는 그들을 물로 제압한 후 주걱으로 젓기 시작하는데 알알이 엉킨 채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쓴다. 그때 바로 눈치챘어야 하는 것을.
길게 썬 파와 오징어 약간, 반죽 한 국자, 그 셋을 따뜻한 불에 촉촉이 연결시켜 주었다고 생각할 즈음 두꺼운 반죽에 파묻혀버린 파와 오징어가 자신들이 사라졌다고 아우성이다. 물을 적게 넣었나 보다. 빵인지 파전인지 모를 첫 번째 부침개를 들어내고 두 번째 부침개를 굽는데 이번에는 반죽이 묽어 흐느적거린다. 인심도 얻고 증명도 해보이려 찰나에 이 무슨 연이은 참패인지.
다시 녀석을 집어 들고 반죽 그릇에 부으려는 순간 인정머리 없는 나를 향해 들려오는, 선견지명 같은 그녀의 쨍쨍한 목소리 ‘실력 되세요?’
그 물음 앞에 나이도 경력도 사라지고 부침가루 한 봉지가 비웃듯 반죽을 점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