끓어오르던 찌개가 멈춘다. 가스 불을 약하게 낮추고 두부를 잘랐다. 무슨 일일까. 그럴 사람이 아닌데. 아무 일 없겠지 하면서도 걱정이 저 혼자 눈덩이처럼 구르며 부피를 늘려간다.
3일째다. 돼지고기 한 근 사러 보낸 딸아이 손에 오후 내내 하얗게 내리던 눈만 서걱서걱 묻어 있다. 불빛도 메모도 없고 가게 앞 나무에 묶어둔 자전거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휴대폰 번호라도 저장되어 있으면 문자라도 해 볼 것을. 답답해진다.
밤새 눈이 많이 녹았다. 걱정은 녹지 않았는데 아침 햇살에 눈길이 질퍽질퍽하다. 할 일 없는 장을 보러 집을 나선다. 가게 문이 열려 있으면 국거리라도 사 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문을 열 시각이 한참 지났는데 그대로다. 유리문 틈 가게 안을 훔쳐봐도 누가 다녀간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진열대 위 저울도 0을 가리키고, 바구니에 담긴 김도, 종이 꾸러미에 포개놓은 달걀도 층층이 쌓여 있다. 냉장고 안에 깻잎이며 상추, 무, 버섯 등은 무사할까. 모든 게 정지된 채로 정물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상가 입구 쪽 도로변을 두리번두리번 살폈다. 주인아저씨가 자전거를 타고 숨 가쁘게 달려오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내린 눈 탓인지, 겨울바람 탓인지 이리저리 사방을 둘러봐도 찬바람만 얼굴에 닿을 뿐, 오가는 사람도 자전거 바퀴도 드문드문하다.
발걸음을 돌리려던 찰나, 옆 가게 세탁소 주인이 문을 열고 나온다. 정육점 부부 소식을 물어볼까 망설이다 양손 가득 세탁물을 들고 바삐 걸어오는 젊은 새댁을 보곤 상가를 나와 버렸다.
지난번처럼 메모라도 붙여두면 좋았을 것을. 아니 메모 없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도 든다. 유리문에 붙여둔 하얀 메모 때문에 가슴을 쓸어낸 적도 있었으니.
몇 해 전이다. 입에 올리기도 힘든, 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흉흉했던, 이태원 참사 소식을 접한 이틀 뒤다. 그날도 정육점이 닫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날 저녁부터 굳게 닫혀 있었다.
간판은 정육점이지만 양파나 감자, 콩나물, 두부 등 이런저런 야채도 함께 팔고 있어 오가며 찬거리를 사러 들르게 되고, 장바구니 안에 찬거리뿐 아니라 호탕하고 시원시원한 아주머니 웃음소리도, 정 많고 푸근한 아저씨 하소연도 한두 움큼씩 담아오게 된다.
그 이야기만 듣지 않았어도 메모 한 장에 소스라치듯 놀라진 않았을 것을. 신호등 건너 불 꺼진 정육점 유리문에 깨알같이 써 놓은 메모가 전날 들은, 대학 졸업반인 부부의 둘째 딸이 핼러윈 축제에 간다는 말과 겹치며 내 마음속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가게 문이 닫힌 것은 십여 년 동안 그날이 처음이었다. 일요일에도 설이나 추석 당일도 불 꺼진 가게를 구경한 적 없고, 아저씨가 교통사고를 당해 한 달간 입원해 있을 때도 문은 열려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휴일을 가졌으면, 설과 추석이라도 쉬었으면 하는 바람을 건네기도 했지만 일하는 게 쉬는 것이라는 아저씨 궤변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랬던 가게가 문이 닫혔고, 더구나 멀리서 다닥다닥 붙은 휘날린 글자가 보이는데, 들은 이야기와 겹치며 한순간 회오리바람이 일듯 걱정이 부풀고 만 것이다.
건널목을 건너고, 메모와 가까워질수록 수은주처럼 껑충 뛰어오르는 불안감. 자음과 모음이 이토록 서늘하게 곤두박질치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16절지를 절반 접은 하얀 종이에 두서없이 날린 글자들이 눈에 촘촘히 박히면서 가슴을 황급히 쓸어내린다.
‘막내인 아들 녀석이 그렇게 가지 말라고 애원했던, 귀신 잡는 해병대에 입대하는 날입니다. 새벽부터 울고불고하는 마누라 때문에 도저히 가지 않을 수 없어 전 가족이 출동합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마지막 글귀를 읽으며 ‘아저씨도 참,’이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지만 메모 속에 빙그레 웃는 부부 얼굴이 떠올라 덩달아 피식 웃고 말았다. 나중 부부의 둘째도 핼러윈을 마다하고 배웅을 다녀온 덕분에 화를 면했고, 그것만으로도 십년감수했다는 아주머니 뒷이야기를 들으면서 몇 번이고 다행이다 싶었다.
해병대 지원은 얼핏 들었지만 입대하는 날 문을 닫으리란 생각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내외지간이 똑같이 ‘남 다 가는 군대, 뭐 하러 따라가냐.’고 펄쩍 뛰었기 때문이다. 애타는 마음이 문을 닫으면 안 된다는 철칙도 깨뜨릴 것을 그때는 몰랐을 것이다.
평소 다른 가게처럼 한 달에 한두 번 쉬었다면, 장바구니에 마음 빼고 물건만 담았다면 걱정도 덜었을 것을.
창문 밖 오후 햇살이 무료한 나뭇가지에 머물다가 아이들 운동화 위로 건너간다. 지금쯤이면 질퍽질퍽한 길도 매끄러워졌겠지. 두세 번 찬바람 먹은 외투를 다시 걸쳐 입고 지갑을 든 채 집을 나섰다.
나와 정육점 사이 직감의 통로가 이제야 뚫린 것일까. 도로에서 상가로 들어오는 키 큰 나무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익숙한 자전거 바퀴. 환한 가게로 들어서는데 접어둔 책의 페이지를 다시 펼쳐 읽는 것처럼 걱정은 사라지고 반가움이 솟구친다.
불 꺼진 3일의 흔적은 30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다. 형편이 어려워 미뤄 둔 신혼여행을 서른 해 만에 다녀왔다며 멋쩍게 웃는 아저씨. 왜 그리 아등바등 살았는지, 가게 문을 닫으면 죽는 것도 아닌데 아이 셋 졸업사진에 얼굴 한 번 비친 적 없다며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만 한가득 안고 왔다고 한다.
무심히 지나쳐 온 삶의 많은 간이역. 뒤돌아보면 그곳마다 크고 작은 풍경들이 달려 있었을 텐데. 눈시울이 붉어진다.
다음에 갈 때는 ‘오늘은 쉽니다.’, ‘3일 쉽니다.’ 하나만 가게 문에 붙여달라고 부탁한 후 가게를 나선다. 자전거를 메어 둔 나뭇가지에 하얀 풍경 하나가 새롭게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