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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꼼지 Sep 05. 2022

혼자 먹는 돈까스의 맛

  부부싸움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타이밍에 시작된다. 토요일 아침, 잘 잤냐며 인사를 주고받은 지 한 시간도 안 되서 부부싸움이 났다. 아침밥 준비를 하는 동안 남편에게 주방의 쓰레기를 치워달라 부탁했더니 "네가 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서운해하자 남편은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왜 나에게 시키냐."며 눈을 크게 뜨고 따다.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내가 부탁한대로 쓰레기를 치우고 있다.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이 나왔다. 정말 저 남자는 왜 저러는 걸까. 해줄 건 다 해주면서도 말을 왜 저렇게 밉게 하는 걸까.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남편을 불러세웠다. 부탁하는 아내에게 "네가 해."라고 대답하는 건 너무 섭섭하다 이야기하자 남편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냉랭하게 내 옆을 스쳐지나갔다. 가슴 속에 묵직하게 얹혀있던 무엇이 '펑!'하고 터졌다. 그렇게 백만스무번째쯤의 부부싸움이 시작되었다.


  집 전체에 냉랭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아기가 깨어있는 동안은 싸울 수 없으므로 서로가 서로를 피해다다. 내가 거실에 있으면 남편은 컴퓨터방에, 남편이 거실에 있으면 나는 안방에. 그렇게 눈길도 마주치지 않고 피해다니던 남편과 정수기 앞에서 마주쳤다. '혹시 사과하려는 건가?'하고 작은 기대감을 가져보았지만 아니였다. 그냥 물을 마시러 나온 거였다. 물을 한컵 들이켜고 사라지는 남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침밥을 준비하다가 싸움이 시작되는 바람에 밥은 딸만 먹이고, 부부는 종일 공복이었다. 밥통에는 두 사람치 밥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자주 방문하는 인터넷 카페에 '남편과 싸우면 밥을 어떡하나요? 남편 밥 차려주나요?'라는 질문이 올라온 걸 본 적이 있다. 댓글에서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싸웠어도 밥은 차려준다 vs 싸웠으니 밥은 각자 먹는다. 우리 부부는 싸우면 굶는데, 우리 부부같은 경우는 드문 모양이었다. 나는 남편과 싸우면 입맛이 똑 떨어져 밥을 먹지 않는다. 속상한 걸 참고 뭘 먹으면 대번에 체해서 안 먹는게 낫다. 그런데 우리 남편은 내가 밥을 먹지 않으면 본인도 먹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부부싸움과 함께 강제로 단식을 한다.


  엄마와 아빠가 싸워서 쫄쫄 굶고 있는 동안 딸은 두번째 식사를 했다. 평소라면 딸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내가, 치우는 일은 남편이 하지만 싸우고 나면 패턴이 달라진다. 서로 대화를 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으므로 그렇게 손발이 착착 맞아 돌아갈리가 없다. 식사를 준비하고, 치우는 일까지 모두 내 몫이다. 내가 설거지를 하는 소리가 나자 남편이 나오더니 딸과 놀아주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육아의 바톤이 남편에게 넘어갔다.


  설거지를 마치고 안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워있는데 새삼 화가 치밀어올랐다.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 너는 남편이랑 싸웠을 때 화나는 마음을 어떻게 달래니

- 웹툰 봐

  딱히 즐겨보는 웹툰도 없는 나는 포털사이트를 돌아다녔다. 세상 행복한 얼굴의 여배우가 다정한 남편과 결혼해서 행복해죽겠다는 기사 따위를 읽고 있자니 분통이 터다. 친구에게 기사의 링크를 보냈다.

- 이 여자는 남편한테 말로 상처받은 적이 단 한번도 없대.

  그러자 친구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 거짓말이야. 그럴 리 없어.  


  결국 종일 남편과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보냈다. 시끄러운 속을 달래기 위해 냉장고를 뒤집고, 싱크대를 정리했다. 오래된 식재료들을 버리고, 여기저기를 쓸고 닦는동안 아기는 남편이 봤다. 집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데, 내 속에서는 구정물이 흐르는 기분이다.


  딸을 재우러 방에 들어와 문을 닫자 잠시 후, '삐그덕'하는 소리가 들렸다. 라면과 간식을 보관하는 정리함의 문이 열리는 소리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것 같지만 뽀시락뽀시락 비닐을 만지는 소리는 숨길 수가 없다. 과자? 라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봤으나 뭔지 알 수가 없다. 화장실에 가며 슬쩍 보니 남편은 컴퓨터를 하며 과자를 먹고 있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할 입은 없고, 과자 먹을 입은 있구나. 얄미워서 한 소리 할까 하다가 관뒀다. 남편이 먼저 말을 걸 때까지 절대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돌아섰다. 


  다음날, 또다시 딸에게만 밥을 해먹이다가 울화통이 터졌다.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거지같은 주말을 보내야 하는가! 충동적으로 집을 나섰다. 마땅히 갈 데가 없어 집 근처의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가씨 때는 이렇게 기분이 안 좋을 때 립스틱 같은 걸 사면 기분이 좋아지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백화점 1층의 화장품 매장을 돌아다니다보니 하나에 3,4만원 하는 립스틱을 사봤자 별로 기분이 좋아질 것 같지가 않다. 어차피 마스크 쓰고 다니는데 립스틱 바르고 갈 데도 없다.


  백화점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식당가까지 올라갔다. 음식냄새를 맡자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했다. 한참을 고민하다 딸과 함께 자주 가던 돈까스 집에 들어갔다. 돈까스를 시키고, 충동적으로 맥주도 한 잔 시켰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며 주변을 보니 혼자 앉아있는 사람은 나 뿐이다. 아무리 혼밥이 유행인 시대라도 일요일 이 시간에 혼자 밥먹으러 나오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


  다행히 맥주가 먼저 나왔다. 빈 속에 시원한 맥주를 들이켜자 찌르르한 알콜의 기운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다. 혼자 앉아있기 쑥스러웠던 마음을 맥주 한 모금에 날려버리고, 갓 튀겨나온 돈까스를 천천히 먹었다. 혼자 먹어도 돈까스는 맛있었다. 하지만 돈까스 한 조각에 맥주 한 모금, 그렇게 천천히 밥을 먹고 있자니 온갖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행복하게 살려고 한 결혼인데 우리는 왜 이러고 사는 걸까. 남들도 다 이러고 사는 걸까, 우리만 이러는 걸까. 아기는 지금 뭘하고 있을까. 딸도 이 돈까스를 좋아하는데...


  문득 딸이 보고 싶어졌다. 어디에 가는지 말도 않고 나간 엄마를 찾고 있을지도 몰랐다. 마지막 돈까스 조각을 입에 밀어넣고, 맥주를 털어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들어가니 아기와 놀고 있던 남편은 여전히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싱크대 구석에 컵라면 그릇이 보였다. 내가 없는 사이에 너도 뭔가를 먹었구나. 서로 떨어져있는 시간동안 각자 배를 채운 부부는 그렇게 다시 재충전한 힘으로 냉전을 이어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자존심 싸움만 하는 주말은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렀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엄마, 아빠랑 번갈아 놀던 딸도 지루한지 슬슬 짜증을 부다. 짜증 부리는 딸을 달래느라 남편과 같이 거실에 앉았다가 눈이 마주쳤다. 바보같은 남편은 그 타이밍을 잡을 줄 모른다. 애할 때 키스타이밍은 귀신같이 알더니 사과의 타이밍은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건지 죽어도 미안하다는 말을 안 한다.


  결국 이번에도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나 진짜 속상한데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그 말을 듣고도 남편의 침묵이 길었다. 내가 눈빛으로 재촉하자 제서야 간신히 입을 열고 한 마디 한다. 미안해. 속상한 시간이 길었으므로 다정한 말을 몇 마디 더 듣고 싶지만 그런 건 없다. 미안해, 라는 말이 남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과다. 그 한 마디 말을 듣는 데까지 30시간이 걸렸다. 사과를 받은 건지 내가 사과를 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부부의 화해에는 여유가 없다. 엄마, 아빠의 관심이 잠시 자신에게서 멀어지자 딸의 땡깡소리가 드높아졌다. 마음이 풀어지지는 않았으나 어쨌든 화해라는 걸 한 부부는 황급히 육아의 세계로 돌아갔다.


  직장 성실히 다니고, 술 안 먹고, 담배도 안 하고, 아기 좋아하는 남자랑 결혼하면 싸울 일 같은 건 없을 줄 알았는데 날이면 날마다 싸우며 산다. "기분 나빴어? 미안해."한 마디면 끝날 수 있는 일이 이번처럼 30시간, 길게는 2주까지 이어진 적도 있다. 이번처럼 맥없이 화해한 적도 있지만, 더 큰 싸움으로 이어져 사네마네 한 적도 있다. 렇게 지긋지긋하게 싸우면서도 또 화해하고, 또 싸우고... 살벌하게 싸우다가도 언제 그랬냐는듯 한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있는 이놈의 부부라는 관계는 결혼한지 5년이 지났는데도 적응이 안 된다.


  백만스무번째의 화해를 하고 부부가 가장 먼저 나눈 대화는 저녁에 뭘 먹을까, 에 관한 것이었다. 저녁을 먹기 전에 슬쩍 체중계에 올라가보니 1kg가 빠져있었다. 부부싸움하느라 마음 고생한 건 금세 잊고, 줄어든 몸무게의 숫자에 기분이 좋았다. 그 1kg는 30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원래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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