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메모] '유저 프렌들리' 발췌
오랜만에 속초 동아서점을 들러 발견하게 된 책 '유저 프렌들리'.
평소 UX 문제를 어떻게 접근하고 다뤄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좀 더 근본에 가까운 사례들을 많이 접하는 것이 도움이 제법 되는 것 같다. 스마트폰이 있기 훨씬 전의 사용자 경험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부터 풀어나가는 책이다. 책 초반에 곱씹을만한 사례가 있어 일부 편집하여 발췌했다.
'고객을 생각하라, 유저를 생각하라'는 만트라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엿볼 수 있다. 역시 일이 잘 안 풀릴 땐 유저 관찰, 유저 인터뷰로 돌아가야 하는 듯 :)
때는 1925년, 헨리 드레이퍼스는 늘 입던 갈색 정장을 입고 새로 지은 화려한 RKO 극장 앞에 꼼짝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었다. 드레이퍼스는 당시 겨우 스물한 살이었지만, 이미 브로드웨이 공연 디자인의 귀재로 알려져 있었다. 화려한 성공 덕에 드레이퍼스는 자신을 디자이너라기보다 소비자의 수요를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홍보할 수 있었다.
드레이퍼스는 멀리 뉴욕에 있는 극장 소유주들을 오랫동안 괴롭혀온 문제를 해결하러 와 있었다. 이들은 이 새로운 명소에 거액을 투자했지만, 건물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극장의 위치는 좋았다. RKO 극장은 아이오와주 수시티 시내의 번화가에 있었는데, 인기 보드빌 순회공연도 유치하고 인기 있는 신작 영화도 상영했다.
하지만 아이오와의 단란한 가족들과 농부들은 극장의 화사한 입구와 보행로를 덮은 고급 레드카펫을 총총거리며 지나쳐 길 저쪽의 허름한 다른 극장으로 들어가 버렸다. 관람비를 낮췄고, 표 한 장에 영화 세 편을 상영했으며, 음식도 무료로 제공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소용없었다. 왜 그런지 알아보려고 드레이퍼스는 멀거니 서서 사람들을 그냥 관찰하고 있었다. 사흘 동안 관찰만 한 뒤 드레이퍼스는 극장 로비로 들어가 관람객들이 하는 말을 엿들었다.
누군가가 이런 고급 카펫을 진흙 묻은 발로 더럽힐까 봐 얼마나 겁나는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극장의 반질반질한 입구에 매끈한 카펫이 목구멍의 혀처럼 늘어져 있는 모양을 돌아보니, 동네 '농사꾼과 일꾼'들이 얼마나 주눅이 들었을지 보였다.
처음 주어진 문제, 즉 극장 디자인을 개선해 달라는 문제는 결국 본질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극장이 충분히 좋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디자인 탓에 극장은 현실적이고 소박한 아이오와 사람들이 보기에 지나치게 좋았던 것이다.
다음날 드레이퍼스는 사람을 불러 카펫을 뜯어내고 평범한 고무 깔개를 놓았다. 그런 다음 극장으로 돌아가 기다렸다. 처음에 두 명이 오더니, 몇 명이 더 오고, 또 몇 명이 더 오고, 또 몇 명이 더 와 극장이 가득 찼다. 묘안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고작 깔개 하나로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 의아할 수 있다. 그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창피하고 혼란스러운 면, 호기심과 자존심이 강한 면까지 속속들이 이해하면 그 사람의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디자이너의 관심을 '무엇을 만들까'와 '어떻게 만들까'에서 '누구를 위해 만들까'로 돌렸다.
- 유저 프렌들리, 73-74p. 클리프 쿠앙/로버트 패브리칸트, 청림출판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