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11:41
밤부터 비가 온다. 비행기에서는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어김없이 빗소리에 잠을 설쳤다. 방충망이 없어서인지 파리의 비는 계절을 가리지 않고 오기만 하면 창문을 유독 거슬리게 때려댄다. 새벽부터 깨어있었지만 침대에서는 열시가 넘어서야 기어 나왔다. 일찍 일어나면 뭐해. 어차피 혼자 보내는 긴 하루일텐데 말이다. 기내식말고는 먹은게 없어 출출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아 냉장고를 열어보니 기억했던대로 냉장고는 텅 비어있다. 뭐라도 먹으려면 밖에 나갔다와야 하는데 오늘은 사람들과 마주치지가 싫다. 부엌에 가는데도 옆방 애들을 혹여나 마주칠까봐 나가기 전 문에다 귀를 대고 체크를 했다. 칠흑같은 심해의 바닥으로 가라앉아 숨고 싶은 기분이다. 앞이 안보이는 물고기가 툭툭 건드려도 모른 척 가만히 있어도 되는 그런 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고 싶다. 그래도 파리의 내 방은 오롯이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곳이라 묘한 안도감같은 것을 준다.
한국에 있는 2주 동안은 운동을 단 하루도 하지 않았는데, 아마 올해 들어 최장기간 운동을 쉰 것이 될테다. 여기저기서 추천받은 책을 두권 사 읽었는데, 둘 다 흥미로웠지만 한 권은 읽고나서 경멸하게 되었고, 한 권은 다시 몇 번 더 읽어봐야 할 것 같았지만 엄마 읽으라고 두고 왔다. 그 외에는 가능한 한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대부분의 시간을 쇼파를 중심으로 반경 2미터 안에서 보낸 것 같다. 속이 쓰림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맵고 짜고 강한 음식들도 마음껏 먹고 왔다. 그렇게 빈둥대며 연말을 보내느라 새해가 시작된지 이틀째인데 아직 올해의 목표들을 세워 적지 못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이후로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나는 다이어리를 사고, 그 앞에다 새해 목표 10가지를 적는데 11년 째 되는 올해에는 10가지를 채울만한 참신한 생각들이 떠오르지가 않는다. 2016년은 돌이켜보면 최고의 해도 아니었고, 그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은 그런 일년이었지만 그 비루한 한 해에 아이러니하게 나는 10년을 통틀어 최고 목표 달성률을 찍었다. 너그럽게 보면 10개 중 10개, 좀 짜게 보면 7.5개 정도를 달성하였는데, 늘 4개에서 6개 사이 정도이던 지난 해들에 비하면 이것은 괄목할 만한 성과다. 이래서 사람 사는 모양은 숫자로 평가하면 안된다.
PM 12:22
장을 보러 나갔더니 비가 아니라 진눈깨비였다. 커피 한잔 내려마시면서 지난 해 마지막으로 본 영화인 라라랜드 사운드트랙을 들었다. 동화같은 음악과 비주얼로 저렇게 촌철살인 현실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다니. 위트와 유머가 넘쳤지만 영화관만 아니었더라면 더 펑펑 울었을 그런 영화였다. 이건 마치 LA판 물랑루즈같다. 좀 전에 이야기했던 연말에 읽은 책 2권 중에 하나는 "인간실격"이라는 일본의 근대 소설이었다. 본인의 인문학적 소양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걸작이라며 추천해 준 책이었는데, 읽는 내내 드는 경멸감에 책을 덮고 싶었지만 끝까지 읽었고, 끝난 이후에도 여전히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기저에 깔린 구닥다리 식의 남성 우월주의, 여자가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낳아 키우고 그 자의 부도덕함을 너그러이 이해하고 놓아주며 자기는 혼자서 도덕 혁명을 이루겠다는 그 비장한 편지에서 혐오감이 절정에 치달았다. 일본 특유의 한없이 복종하는 여성상과 도덕의 기묘한 부재, 낮과 밤같은 인간의, 특히 남자의, 이중성이 허용되는 분위기. 이차대전 시기의 결핍 된 젊은이들에게 아이돌 정도 됐을 법한 그런 책이었다. 삶의 의지와 혁명의 열정 따위라고는 없는 몰락한 귀족의 나약하고 현실파악이 안되는 방황이다. 이런 이들은 대체적으로 겉모습에 치중하고, 자기 눈 앞의 세계가 꽤 많은 것을 반영하고 상징하고 있다고 착각하며, 자기 합리화에 능하다. 선택을 할 줄 모르며, 남의 선택에 이끌려가는 것에 익숙하여 그것을 봉사 혹은 동정심에 오는 자기의 박애주의적 선택이라고 착각한다. 노력없이 자란 이 답게 이들은 눈 앞에서 말하지 않고 뒤에 숨겨놓는 미세한 혐오와 무시의 공포를 모른다. 순진하다고 해야할 것이다. 나는 치열함이 없는 이런 순진함이 너무 싫다. 삶은 자고로 투쟁하듯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콜드 플레이 콘서트 표를 예매하고, 쉑쉑버거를 먹기 위해 줄을 서고, 새로운 아이폰 시리즈를 먼저 사기 위한 치열함이 아니라 왜 사는지 생각하고, 살기 위해 애써보고 좀 더 잘 살려면, 더 많이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아픈 실패 끝에, 쓰라린 이별 끝에 죽을 것 같이 아픈 가슴으로 고민해보는 치열함으로 살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 좋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고 감사할 줄 안다. 그렇지 못한 나르시시스트 작가는 자신의 추악함과 타락을 대중에게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예술을 수단으로 이용한 것 같았다. 지탄이 두려워 3인칭 서술의 비겁한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를 투영하여 만든 요조에 대한 우상화를 멈추지 않았다. 오스카 와일드의 말에 따르면 요조는 그냥 존재하다 간 인물이다. ("To live is the rarest thing in the world. Most people exist, that is all.") 충동과 자제심을 묘하게 건드리는 이런 나쁜 예술에 한 때는 나도 끌렸던 적이 있었지만 라라랜드같은 선한 예술이야 말로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예술로 끌어내어 어루만져주는 아무나 만들어낼 수 없는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가 매해 세우는 삶의 목표들은 나를 살게 하는가. 모든 사람은 예술을 해야한다.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다. 예술이야말로 자기성찰의 도구이고 삶을 채우는 양분이고 사람을 겸허하게 만드는 가르침이다.
PM 1:13
드디어 올 해의 목표 10가지를 다이어리에 적었다.
1. 운동 꾸준히 하기 (일주일에 4번 이상) + 체력/체중 유지
- 항상 목표 일번은 운동이었다. 이건 해가 넘어도 변하지 않는다.
2. 건강하게 먹고 잠 잘 자기
- 드디어 잘 먹기와 잘 자기가 고민이 되고 희망 사항이 되는 나이가 온 것이겠지.
3. 취직해서 돈벌기
- 가장 간절한 목표. 스물 아홉에 다시 취준생이 된다. 한 해가 끝날 때에는 다시 직장인이 되어 있길.
4. 불어 B2 시험 통과하기
- 시험을 꼭 쳐야겠다. 물 들어왔을 때 노 저어야지.
5. 책 20권 이상 읽기
- 좋은 영화도 많이 봐야지.
6. 겨울 지나기 전에 스웨터 하나 떠보기
- 해마다 뜨개질은 시작만 하고 끝이 나지 않지. 양말 그만 뜨고 올해는 기필코 스웨터를 떠보자.
7. 창작 10가지 이상 뭐든 만들어 남기기
- 글, 그림, 사진, 뜨개질, 요리, 바느질 무엇이든. 예쁜 입체 카드를 만들어보고 싶고, 정갈한 밥상을 한상 차려내보고 싶고, 새로운 재료로도 그림을 그려보고 싶고, 담백한 긴 글을 쓰고 싶다. 늘 머릿 속엔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대한 생각들이 가득한데 올 해에는 그걸 좀 더 열심히 실천으로 옮겨내보고싶다.
8. 안 가본 곳 가보기, 못 올라 본 산 등산하기
- 아직 세상엔 내 발이 닿지 않은 곳이 너무 많다는 건 생각만 해도 설렌다.
9.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잘하기
- 예전에는 혼자 있는 걸 못 견뎌서 문제였는데, 언제부턴가 새 친구 사귀기가 새해 목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내 곁에 있는 가족들, 남자친구, 친구들한테 더 사랑스럽고 좋은 사람이 되자.
10. 재미있게, 신나게, 후회하지 않게, 부끄럽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