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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영 Feb 17. 2017

근황

발렌타인 데이엔 아파서 하루종일 쉬었다. 데이트는 없었지만 기념일의 취지에 맞게 로맨스 영화를 하나 봐야겠다 싶어서 La vie d'Adele(가장 따뜻한 색 블루)을 봤다. 20대 초반의 가볍고 한없이 가볍던 나보다 지금 파리에서 공부를 하는 조금은 더 무겁고 우울해진 나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파리를 먼 훗날 다시 돌이켜본다면 도시 전체를 은근히 감아도는 절제되지 않은 흥분과 도취가 가장 그리울 것 같다.  흥분과 도취. 이들은 항상 주변을 맴돌지만 내가 낚아채지 않는 이상 그저 살갗을 간지르는 정도에 불과해 가끔 나를 안절부절하게 만든다. 오늘같은 날은 너무 가려워서 소리를 지르며 살갗을 뜯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며칠 전에는 바둑을 좋아하는 지인이랑 이야기를 하다가 알파고를 만든 딥마인드라는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봤는데, 딥마인드가 최근 보건/의학 분야에 중점 투자를 하는 것을 보고 이런 데서 일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전히 내가 공부하는 보건분야는 의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들이 좀 더 뻐겨대고 정통 질병역학 분야가 주조를 이루고 있긴 하지만 급격하게 부상하는 보건 경제학이나 모바일 헬스, 원격 의료 시스템들을 보면 아직은 니치에 불과하지만 분명 기존의 패러다임과는 다른 크로스오버가 일어나고 있다. 대학 시절 컴공과 복수 전공이 하고 싶어 여러 교수님들께 상담을 받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너처럼 생명에 컴공 복수하는 애들은 한번도 못봤어." 하시는 바람에 포기를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후회되는 일 중에 하나다. 물론 그 덕분에 나는 방학 때 마다 열심히 놀러 다니고 교환 학생도 마음 편히 다녀왔지만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니 가지 말라는 그 조언은 얼마나 멍청한 조언이었는가.

각설

일주일 전부터 차근차근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내 단칸방은 화수분인지 분명 가져온 것도, 산 것도 많이 없는데 꺼내도 꺼내도 짐이 자꾸 나온다. 이사와 짐싸기는 정말 신물이 난다. 고등학교 기숙사부터 시작하면 벌써 이사가 몇 번인지도 모르겠다. 파리로 오기 전 합정동 집을 비우면서 혼자 짐싸는게 너무 힘들어 울면서 했던 기억이 났다. 타지 생활에서 가장 서러운 것을 꼽으라면 나에게는 단연코 이사다. 이번에는 울지 않으려고 일찌감치 시작했고, 과감하게 많이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솎아낸 옷들은 건물 청소하시는 아줌마들 골라가시게 해드리고 나머지는 난민캠프에 기부를 해버렸다. 착한 일을 하면 버리는 것보단 한결 기분이 나을까 했는데, 내 손을 떠난 옷 어딜 가나 아깝긴 매 한가지였다. 

이사 준비 외에는 뉴욕에 가면 술이 비쌀테니 최대한 와인을 많이 먹고 가려고 발악 중이다. 오늘 드디어 비자가 붙은 여권이 도착했고, 이제 파리에서 남은 시간이 이틀도 채 되지 않는다. 좋아하던 식당들을 다시 찾아갔고, 몇 번을 걸어도 매번 똑같은 뭉클함을 주는 예쁜 길들을 여러번 일부로 다시 걸었고, 지하철 대신 최대한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파리를 눈에 담았다. 싫증이 나기 전에 떠나는건, 그 떠나는 대상이 남자건 도시이건 직장이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꽤 쓸모있는 능력이긴 하지만 십상 버릇을 잘 못들이기에 딱이다. 떠남으로 인해 나는 좋은 기억들만 골라 가져가지만, 그 아련한 분홍빛 추억 말고는 나를 거쳐간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온전히 아는 것이 없는 것 같다. 반복할 수록 나에게서는 미련도, 애착도, 노력도 줄어든다.

정리에는 소질이 없는데 그걸 혼자 해내느라 애를 쓴 탓인지 며칠 째 조금 아팠다. 

참 웃기는 일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남은 인생이 너무 길어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아야할지 도무지 알수 없던 혼란의 시기에 어른들이 넌 커서 뭐하고싶니 물으면 당돌하게 "전 20대는 유럽, 30대는 뉴욕에서 살거에요." 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우습게도 난 20대 중 3년 이상을 유럽에서 보냈고, 30대가 채 오기도 전에 뉴욕에서 몇 개월 살아보는 호사를 누리게 되었다. 비록 예전에 비해 사람들을 더 가리게 되었고, 쉽게 피곤해지고, 지새우며 노는 밤도 줄어들었지만, 그래서 이제는 내가 정말 지겨운 사람이 되었나 싶은 걱정이 들다가도 방법도 모른 채 막연하게 읊곤 했던 어린 시절의 꿈들이 어떻게든 조금씩 실현되는 것을 보니 내가 썩 못 살고 있지는 않은가보다 어렴풋이 짐작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내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에게는 말해주고싶다. 겉으로 보기엔 멋져보여도 실상은 똑같이 아등바등대고, 다른 삶을 부러워 하고, 후회와 자책과 갈등도 하며 살고 있다고. 고독과 서러움을 담백하지만 궁상맞지 않게 풀어내는 사람들이 참 멋지다. 반대로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찌질한 사람들도 참 멋지다. 세상에는 멋진 사람들이 참 많다. 나도 내 쪼대로, 다만 착하게 살아야지.

매거진의 이전글 2017년 1월 2일 파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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