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재택 근무 중인 거실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와 뉴욕의 공기는 확실히 다르다. 아무래도 파리는 뉴욕에 비해서는 마냥 말랑하고 아름답다. 뉴욕에 살기 전에는 파리의 늘 취해있는 듯한 분위기가 나름 고조 된 상태라고 생각했는데, 그렇다면 뉴욕이 가진 느낌은 폭발 직전의 폭탄처럼 응축 된 긴장이다. 파리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헤밍웨이를 다시 꺼내 읽다가 문득 방금 떠나온 뉴욕이 그리워졌고, 헤밍웨이 따위 내팽겨치고 케루악을 꺼내 읽고싶은 충동이 들었다. 케루악을 읽고나면 헤밍웨이가 시시하듯 뉴욕을 알고나면 파리가 다르게 보인다. 파리는 그림으로 그려내고 싶은 반면 뉴욕은 글을 쓰고 싶어 지게 만드는 도시다. 헤밍웨이가 파리에 살던 시절 파리에는 예술가들이 넘쳐났고, 유일한 결핍을 꼽자면 돈이었을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까페와 바를 전전하며 사람들을 만나 수다를 떨고 영감을 충전하고 글을 쓸 만큼의 여유는 있었다. 잭 케루악과 친구들이 만들어낸 비트 제너레이션은 결핍과 분노와 무절제의 상징이다. 같은 맥락으로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생각했다. 언젠가는 러시아에서도 한번 살아봐야 될 것 같다. 산다는 것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제일 진지한 사람인양 살고, 살아 있음에 전율을 느끼고 끝없이 존재의 이유를 고민하는 이들은 겉으로는 매일 매일이 깃털처럼 가벼운 듯 혹은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 무절제와 욕망의 분출과 삐딱함과 반항은 살아있음을 느끼려는 몸부림이고, 숨쉬는 모든 순간의 아름다움을 뼛속 깊이 축하하는 그들의 방식이다. 가장 무책임한 듯 삶을 놓아버린 듯 사는 미친 년놈들이 결국에는 가장 바람직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일테다.
지난 주 뉴욕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일주일은 쉬지않고 여기저기 이동하는 동안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석사 논문 디펜스를 하고, 졸업식까지 했다. 일주일 내내 잠이 안와서, 거기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과 늦은 밤까지 회포를 푸느라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샜는데, 겨우 잠이 들고나면 하루에도 네 다섯개씩 뉴욕, 파리, 한국, 렌느 이렇게 장소가 바뀌어가며 이상한 꿈들을 꾸었다. 뉴욕의 친구를 파리에서 만나고, 파리에서 만난 친구와 뉴욕에 관한 대화를 하고, 만나지 못한 친구를 꿈에서 대신 만나 회포를 푸는 등의 현실과 묘하게 접점이 있지만 기묘한 꿈들이었다. 그러다가 아침에 눈을 뜨면 익숙하지 않은 풍경에 여기가 도대체 어디인지 깨닫는데 꽤나 시간이 걸렸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자꾸 내가 뉴욕에 있는지 파리에 있는지 몰라 장소를 헷갈리며 얘기해서 친구들이 웃어댔다. 내 머릿 속 기억들 중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를 구분 못하는 헷갈리는 일주일이었다. 이제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려면 뉴욕, 한국, 파리의 시차를 다 계산해야 되서 그것도 어렵다. 그저께 파리에는 천둥 번개가 치면서 폭우가 내렸는데, 이제서야 몸이 충분히 피곤해진 건지 그래도 몇 시간 안깨고 잠을 잤다. 잠을 좀 편하게 자고 났더니 이제서야 내가 파리에 다시 돌아온 걸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생체 시계는 뉴욕과 파리 시간의 중간쯤에 머물러 있다. 잠 자는게 제일 힘들다. 아무튼 7월 한달은 파리 백수가 될 예정이다. 뉴욕에서는 할렘 게토에서 살았는데 이번 여름 파리 숙소는 늘 걸을 때 마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생각하며 부러워하던 곳에 싼 값에 얻게 됐다. 집주인 할머니는 내가 머무는 동안 바캉스를 떠나셨고, 같이 사는 룸메이트는 매일 늦게까지 일을 해서 창 밖으로 까날이 보인느 큰 아파트가 전부 내 것인양 느껴지는 호사를 누리게 됐다. 하루 걸러 하루로 친구들을 만나러 자전거를 타고 나가고, 혼자서 피아노도 치고, 이틀에 하루 꼴로 집에서 뉴욕에서 가져온 프로젝트 일을 한다. 널찍한 거실에서 창문 밖 공원과 운하의 경치를 곁눈질하며 소일거리를 하고 있자니 이 무슨 좋은 팔잔가 싶다. 격일제로 쉬엄쉬엄 일을 하는데도 매일 출근할 때 만큼의 속도로 결과물을 내고 있다. 스웨덴 같은 일 6시간 근무제, 재택 근무제, 근무 시간 유연제 가능합니다 국민 여러분!
불면증을 견뎌내는 일책으로 넷플릭스에 가입을 했는데 파리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옥자를 봤다. 봉준호 감독의 유머 감각이 갈수록 대중성을 입어가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나이가 들면서 이 사람의 생각하는 방식을 좀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일까. 아마 후자일 거라 생각이 드는 건 너무 재미없게 봤던 괴물에 대해서 찬양하는 어느 똑똑한 친구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서이다. 시공간을 초월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영감의 원천이고, 풍자이다 못해 조롱에 이르는 내러티브와 모두에게 보여지지만 아는만큼 더 보이게 하는 영화의 깊은 두께와 단층들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외국인들은 설국 열차에서 송강호의 사투리가 더하는 감칠맛을 알 턱이 없을테고, 영어와 한국어를 둘다 구사하지 못하는 관객들은 옥자에서 스티븐 연의 짜치는 통역이 주는 재미를 절대 모르겠지. 사람들이 옥자를 보고 얻어가는 메세지가 무엇일까 궁금했다. 봉준호가 설국열차 때와 마찬가지로 틸다 스윈튼에게 우악스러운 가짜 치아를 끼우고 입꼬리를 내리게 한 이유도. 틸다 스윈튼도 물론이지만 변희봉 할아버지와 제이크 질렌할은 멋진 배우다. 봉준호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연출력은 감탄을 잣는다. 시청각물이 촉발시키는 여러가지 감각과 생각들은 언제나 즐겁다. 렌느에서는 작년에 새로 나온 길모어 걸즈를 보면서 혼자 펑펑 울었다. 내 사춘기 시절을 함께 한 로리도 어느 덧 32살이 되어 나와 비슷한 문제들에 부닥치고 있는 것에 격하게 공감을 하면서. 어제도 뜬 눈으로 밤을 지새다 센스8을 보기 시작했다. 익숙한 도시들이 빠른 페이스로 오버랩 되면서 극이 전개되는 걸 보고 있자니 더더욱 나는 누구이고 지금 어디 있는지 헷갈리는 기분이었다. 아직은 배두나가 제일 대사가 없고 케릭터도 약한 것 같아서 조금 아쉽긴 한데, LGBT-Q의 비중이 돋보이는것이 인상적이다.
일하다 머리가 아파서 동네 한바퀴 돌고 와서 생각나는 말들을 막 써봤다. 오늘같이 하루 종일 혼자 있는 날들은 뉴욕에서는 없었기 때문에 외로워도 좀 즐겁다. 넷플릭스 재밌는 시리즈/영화 추천 환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