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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영 Sep 20. 2018

짧은 김희정 평전

엄마가 없는 엄마의 생일을 처음으로 보내며 올리는 글

외할머니의 산통이 시작된 날은 태풍 사라가 온 날이었다고 했다. 엄마는 꼬박 3일동안 외할머니를 괴롭히고는 태풍이 지나가자마자 세상에 나왔다. 우연의 일치인지 엄마의 죽음은 태풍 제비가 오는 날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전이가 된 암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태풍이 지는 날 한국에 도착한 나는 엄마의 마지막 열흘을 함께 보냈고 엄마는 59번째 생일을 딱 2주 남겨두고 9월 5일에 우리를 떠났다. 암을 확인한 날부터 숨을 거두기까지는 채 2주도 걸리지 않았다. 어찌보면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 열흘동안 엄마는 보고싶은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만났고, 자신이 간 후 해결해야할 일들을 조금씩 천천히 알려주었고, 미울 수도 있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했고, 우리도 그렇게 하라 이르며 타일렀다. 아빠는 그런 엄마의 마지막 순간을 지킨 후 참 김희정답게 갔다고 했다.

엄마는 똑똑하다는 말로도 부족할만큼 총명한 사람이었다. 어렸을 적 외갓집에서 본 성적표에서 엄마는 중고등학교 내내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고, 크면서 만나온 엄마의 친구들은 모두 만날 때 마다 희정이가 얼마나 똑똑했는지, 그 똑똑한 희정이가 전업 주부가 된 것이 얼마나 아쉬운지를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곤 했다. 다만 제약이 많았던 시절에 넉넉하지 못한 집안의 맏딸로 태어난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반대로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대구에서 제일 좋은 국립 대학의 사범대에 그나마 원했던 독일어과를 선택해서 가게되었다. 엄마에게 허용된 선택의 자유는 이렇듯 매우 제약적이었지만 엄마는 그 자유를 찬양했지 제약을 원망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영덕이가 태어난 이후 엄마는 어른들의 권유에 힘입은 자발적인 선택으로 육아에 전념하기 위하여 사표를 냈다. 하지만 똑똑하고 일을 잘했던 엄마는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는 대소를 가리지 않고 투철한 직업 의식을 가지고 임했다. 서류상 무직이었으나 어찌보면 엄마의 직업은 집안일을 다스리는 전업 주부였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든든한 맏딸이었고, 동생들이 모르게 책임을 다하는 큰 언니였고, 우리의 엄마였고, 아빠의 아내였고, 시댁의 며느리였다. 영덕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간 이후 엄마로서의 역할이 급격히 줄어들자 엄마는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봉사활동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엄마는 또 한번 숱하게 많은 이주 여성들의 한국어 선생님이 되었고, 독거 노인들의 도시락 배달부가 되었고 어린이집 아기들의 이야기 할머니가 되었다. 돌이켜보건대 엄마는 자신이 소화했던 여러가지 역할들 중 누구의 딸도, 부인도, 엄마도 아닌 온전히 자신으로서 대접받고 존경받을 수 있었던 교사로서의 모습을 가장 사랑했던 것 같다. 10년간의 짧은 교직생활동안 엄마는 학생들에게 사랑받는 좋은 선생님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전업 주부가 되고 난 이후에도 우리는 스승의 날이면 매해 잊지않고 감사 인사를 보내오거나 엄마를 종종 찾아 오는 제자 아저씨 아줌마들을 보며 자랐고, 엄마는 줄곧 우리에게 진보와 상주에서 교직 생활을 하며 만든 추억들을 즐겁게 이야기해주곤 했다. 최근까지도 엄마는 제자들의 동창 모임에도 초대받아 나가며 바르게 자라 자신과 함께 늙어가는 제자들을 고마워하고 자랑스러워했고, 엄마의 장례식장에는 정말 많은 제자들이 찾아와서 엄마의 가는 길에 인사를 했다. 엄마가 삼십년만 늦게 태어났다면 엄마는 분명 더 큰 뜻을 펼쳤을테지만 삼십년 전 숱하게 많은 제자들에게 심어준 작은 꿈들을 조금씩 합하면 엄마의 이룬 바는 분명히 작지 않다.

결혼은 엄마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아빠와 엄마는 둘 다 똑똑하고 자기 의견이 강했던 탓에 의견의 수렴보다는 대치가 훨씬 더 많았다. 어찌보면 엄마는 결혼으로써 조금 더 불행해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자식 양육에 있어서는 나쁘지 않은 팀이었다. 아빠의 짠 월급으로 네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엄마는 젊었을 때에는 화장도 하지 않고 옷도 사입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딸에게 엄마는 우리 집의 가난에 대해서는 솔직했지만 돈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 납득하고 단념하도록 현명하게 설득했고, 아빠는 그런 우리 가족에게 없는 돈으로도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엄마는 우리가 명절 때 마다 받은 용돈들을 하나도 건드리지 않고 우리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목돈으로 만들어 주었고, 나와 동생이 성인이 되고난 후의 경제권은 엄마와 아빠의 가난과는 별개의 것임을 끊임없이 각인시켰다. 나와 영덕이를 지금의 우리가 될 수 있게 만든 가장 큰 힘은 당신들이 갖지 못한 것들을 우리는 놓치지 않게 키우고 싶었던 엄마와 아빠의 강한 바람일테다. 어려서부터 세계 여행을 당연히 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 것도,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돈이 허락하는 범주 내에서 무조건 해보게 한 것도, 그러기 위해서는 돈은 사치하지 않고 현명하게 써야 한다는 인식을 뼛 속 깊이 심어준 것도 엄마였다. 엄마가 살아있을 적 엄마와 싸울 때면 나는 으레 남들보다 손이 덜 가는 자식임을 내 자랑인양 내세우곤 했는데 그때 마다 엄마는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자신이었기에 이럴 줄 알았으면 너를 이렇게 안 키웠다며 후회를 하곤했다. 덕분에 나는 엄마의 삶과는 정 반대로 그 어떤 책임감과 의무에도 구속 당하지 않고 이렇게 막 사는 당돌한 여자가 되었다.

엄마의 아픈 소식을 듣고 한국에 도착한 첫 날에는 엄마와 병원에서 단 둘이 잠을 잤다. 엄마를 붙잡고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나에게 엄마는 자신이 얼마나 죽음에 대해 담담한지를 조곤조곤 이야기해주었다. 눈물도 흘리지 않고 차분히 나를 토닥이는 모습에 나는 엄마가 미련조차 갖지 않는 세상을 향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엄마는 자신의 죽음을 '해방'이라 정의한다고 했다. 엄마는 죽음으로써 자기가 무겁게 짊어지고 있던 종신형 역할들로부터 자기를 해방시켰고, 아픈 자신을 바라보며 신경이 쓰였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마음의 짐으로부터 해방시켰고, 가장의 무거운 책임감으로부터 아빠를 해방시켰다. 무엇보다도 엄마는 아들딸이 그 어떤 책임감에도 구속받지 않고 마음껏 뜻을 펼칠 것을 다시 한번 신신당부하고 떠났다. 슬퍼하는 우리가 엄마 곁을 떠나지 않고 생업을 소홀히 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엄마는 암이 자신의 생명을 쥐락펴락하기 전에 그 특유의 오지랖과 책임감으로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앞당길 것을 결정한 것 같았다. 혹자가 엄마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더라도 당신은 주체적이고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았음을 증명해보이려는 엄마의 마지막 한 방같은 의지였다. 내가 출국을 예정보다 2주 뒤로 미루었을 때부터 엄마와 나 사이에는 비록 입 밖에는 꺼내지 않았지만 나는 엄마의 마지막을 지킬 것이고, 엄마는 내가 장례식까지 치루고 떠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암묵적 동의같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엄마는 하루하루 눈에 띄게 약해져갔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느리게 스멀스멀 다가오는 엄마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 밖에 없었기에 나는 한없이 무기력하기만 했다. 그리고 당신의 숨이 멎어가는 순간을 함께 한 것은 세상 그 어느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슬픈 경험이면서도 막혀있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은 이상한 안도의 순간이었다. 그 안도감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을 엄마를 위한 것이기도 했고, 엄마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던 나를 위한 것이기도 했다. 시집온 집의 제삿상을 반평생 수도없이 차려낸 엄마는 장례식장에서 이제 다 끝이라 통쾌한 듯 활짝 웃는 영정사진이 되어서 시댁 식구들이 올리는 술과 절을 받았고, 그 모습이 너무 엄마다워 나도 모르게 지켜보다 웃음이 나왔다. 엄마는 그 시대의 많은 여성들이 그러했듯 너무 많이 포기하고 너무 많이 양보하며 살았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조금은 못됐고 이기적으로 키웠는지도 모른다. 평생을 크고 작은 제약에 묶여 산 우리 엄마의 오랜 소원은 자유였고, 그래서 우리는 엄마가 산이 되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되게 하였다. 이제 엄마는 어디에도 없기에 모든 곳에 있다. 그리고 엄마가 떠난 자리에 남은 우리들은 엄마의 빈자리를 나누어 채우며 모두 조금씩 엄마가 되었다. 아직도 엄마 없이는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일들이 많고, 막막한 기분이 들 때마다 나도 모르게 "엄마한테 물어봐야지." 생각하고는 그새 가슴이 철렁하곤 하지만 엄마는 나를 쉽게 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사람으로 키웠다. 나는 엄마의 양보와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보란듯이 멋지게 살겠다. 어디선가 엄마가 보고 있다면 혀를 끌끌 찰 정도로 내 멋대로 내키는대로 살겠다. 그리고 언젠가는 엄마만큼 큰 그릇이 되어 엄마가 그랬듯이 내가 한 고생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른 모자란 사람들을 품겠다. 당신도 있는 힘껏 잘 살았다. 너무 보고싶다 엄마.


* 사진은 내가 태어나기 8일 전인 1989년 10월 13일 만삭의 엄마. 지금의 내 나이보다 딱 한살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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