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휴직 복직 후 일 년, 나에게 벌어진 일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기 직전 육아와 일을 병행하지 못하고 결국 사직서를 내고 말았다. 조금만 더 견뎠으면 역병 핑계를 대고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을 하나 추가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러나저러나 닥칠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나는 비교적 워킹맘-프렌들리 한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중요 스케줄이 없다면 얼마든지 일정을 조정할 수 있었으며, 사려 깊은 동료와 상사의 배려 덕분에 돌도 안된 아이를 두고 나름 직장생활을 해내고 있었다. 내 동료들은 열차시간(경의중앙선)에 맞춰 뛰어들어오고 뛰어나가는 내 모습을 인상적으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나는 괜찮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아이를 만족스러운 보육시설에 맡겨둔 상태였고, 팬데믹 전이라 보육시간은 오후 6시 늦으면 6시 반이나 7시까지도 가능해서,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미뤄두고 남편과 나는 팀워크를 이뤄 일했다. 그저 나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가 하던 일은 기획이 절반이라 다음 주 일정을 계획하고 필요한 경우 관련 이벤트를 기획하고 게스트 섭외에 홍보나 디자인까지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워낙 작은 조직이라 일이 힘들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일이 다양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즐겁게 일했었다. 다만 아이가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육아휴직에서 복직한 이후로는 야근과 저녁에 주로 이뤄지는 이벤트가 조금씩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태어나고 불규칙한 생활을 일삼게 된 탓이었는지 남편은 면역이 떨어져 고달픈 피부질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내 일과에 따라 남편에게 불규칙적으로 육아가 떠넘겨지면서 아슬아슬하던 삶의 균형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저녁에 주로 이뤄지는 이벤트 기획을 더 이상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이 일을 계속할 수 없겠다는 확실한 판단이 섰다. 칼퇴근하고 뛰어나가 시간 맞춰 열차를 잡아타야 그나마 아이와 두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워킹맘으로서는 자는 아이를 보며 살금살금 들어가야 하는 야근이나 저녁 일정이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기획단계에서부터 시작되는 달갑지 않은 마음은 일의 전 과정에 영향을 미쳤고, 일이 점점 즐겁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는 ‘즐거움’이 일의 척도라면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즐거운 일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하루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일하는 시간을 무료하고 즐겁지 않게 보내고 싶지 않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막연히 아 저런 직업, 저런 일! 하던 선망의 일을 하게 되었고, 즐거웠고 행복했다. 지금 되돌아 생각해보면 운도 좋았지만, 나도 끈질기게 그곳을 향해 걸었었다. 현실 엄마가 되기 전 나는 몽상가에 가까웠고, 높은 연봉이나 보장된 삶의 질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 ‘나에게 재미있는 일’에 몰입하던 사람이었다. 그 단순하고도 간절한 꿈을 이루고 나니 복잡한 이유로 일이 즐겁지 않은 때가 불현듯 찾아와 예상치 못한 때에 순식간에 일을 관두게 되었다.
사직 의사를 밝히고 한 달, 인수인계라는 걸 하고 일, 동료들 그리고 공간과 이별하는 시간을 보냈다. 앞으로의 내가 어떨 거라는 예상은 전혀 하지 못했지만,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일을 안 해본 적이 없는 20, 30대를 보내서인지, 일을 안 하는 내 상태를 상상하는 일은 막막하기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 ‘일 안 하는 나’를 상상하는 데 철저하게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