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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aumazein Dec 15. 2020

영원불멸한 관계의 슬픈 미학

자기 안에 우주를 담고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어느 날 내 주위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듯한 때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다.


끝이 없을 줄만 알았던 관계의 끝이 다가올 때,

무던히도 애썼던 모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사라질 것만 같은 허무함에 휩싸일 때,

하나가 부서지며 내 주위 모든 것들이 무너져내려 터널 속에 갇힌 것만 같을 때,

쏟아지는 폭포수와도 같았던 혹독한 시간이,

한 시절이, 한 계절이, 나를 관통해 흘러 지나갈 때.


나와 시간의 경계에 스며드는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그 시간들을 보내며 그냥 이대로도 좋다고,

홀로 충만했던 날들,

그러다 놓고 싶지 않은 삶의 풍경들이

어느새 사라져 갔다는 것을 가슴 아프게 깨닫던 어느 날, 

그 풍경에 애써 머무르고자 시간과 마음이 엉킨 채로

거슬러 올라가려 발버둥 쳤던 나날들.

견디기 힘든 미움과 원망이 내 안에 가득하면

나를 망가뜨릴 수도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 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좌절,

엇을 원망하든 그 미움은 다시 내게 화살이 되어 돌아오지만 아무 일 없었던 듯 미소 지어지지 않던 시간들.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한 사람이 있다.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때론 환희하고 때론 울부짖는.

우리는 그때야 비로소 진짜 나를 만난다.

나도 몰랐던 내 감정과 사고의 원인들,

누구나 겪는 일일 거라고 괜찮은 거라고 애써 치워 놨던

 내 아픔의 기억들, 그 안에서 소리도 치지 못하고 그대로 얼어 떨고 있는 작은 나를 만난다.

그리고 그 작은 나의 손을 잡아 일으키는

또 다른 더 큰 한 사람을 만난다. 그 한 사람,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 안아줄 때 우리는 비로소 깨뜨려지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관계의 아득함. 소통의 노력이 온갖 오해로 점철될 수밖에 없다는 확고한 이해.
이것이 외로움의 본질이다.
당신에게 불현듯 휘몰아치는 깊은 고독과 쓸쓸함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타인에게 닿을 수 없다는 진실을 인정하고 외로워지거나, 타인에게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매번 좌절하거나."
- 채사장,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때로 날아오는 타인의 언행들은 마구 우리를 찔러댄다. 

나를 깨뜨리고 피를 흘리게 한다.

 

"진실과 사실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서로를 지적하고 비난하는 말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말의 내용은 서로의 관점에서 대부분 옳다. 하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외면하지는 말자. 그것이 당신이 그 사람에게 하는 마지막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기억이 당신을 오래 아프게 할 수도 있음을. 나아가 그것이 당신과 세상의 관계를 공허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
- 류시화


그래서 우리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말들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 누구에게도 내가 받은 상처를 주고 싶지 않기에.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의도하지 않지만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하고 살아간다.

그것은 우리는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기에

여전히 그 관계 안에서 상처 받고 치유하고

다시 나아간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관계는 우리를 무너뜨리지만,

한편 우리를 기어이 일으켜 세우기도 한다.

우리는 결국 무너지는 것 안에서 배운다.

 실패, 빈곤, 좌절, 상실, 아픔, 분노...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해도 무엇 하나 이상할 것 없는 상황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고 수긍할 수 있는 결연한 의지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

세계와 세계가 만나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본 경험과 이해가 나의 삶에 강렬한 흔적을 남긴다. 우리는 마주한다.

생의 유한함 속에 흩뿌려진 관계들이

어떻게 자기 안에서 만나 별이 되어 빛나는지.


"겁내지 마라, 두려워 마라,
네 앞에 선 타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라.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사라질 것이고,
서로를 알아갈 시간은 지금뿐이라는 것을."
- 채사장,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우리의 영원불멸한 삶은,

삶 그 자체는 그리 괴롭지도 그리 아름답지도 않다.

그것을 괴롭고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

우리의 만남이다. 그래서 우리의 관계는 슬프지만 아름답다. 관계에서 생겨나는 껍데기에 집착하지 말고

진짜 알맹이를 볼 수 있다면, 

오르던 감정은 섬세한 감성으로,

홀로 괴로워하던 외로움과 고통은

세상에 대한 연민과 이해로..

그렇게 우리는 성숙해질 것이다.


그렇게 무한한 삶 속에 유한한 우리의 만남 속에서

 우리 스스로 만드는 고통을 보라.

그리고 그 고통 안에서 자신의 깊이를 발견하라.

바라보고 바라보고 또 바라보아라.

관계 속에 있지만,

그 관계 너머에서 빛나는 자기 자신을 잊지 말라.

여기도, 저기도 아닌, 지금 여기 자신의 강을 건너온 당신이 그 모든 자신을 품에 안고 당당히 빛나고 있음을.  


잊지 말길.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존재들.

나조차도 그렇게 흐르고 흐르면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가장 소중한 것들만 내 안에 담을 수 있게 되리라.

시간은 흐르고, 그땐 이 괴로움에 뿌리내린 지혜들이

새롭게 내 안에 피어나리라.

그래 결국은 또 한 번 삶에 감사하게 되리라.

비로소 나 자신을 다시 안고 사랑하게 되며,

언젠간 비로소 모두를 사랑할 수 있게 되리라.

애써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보내지만

진정 아무 일도 아닌 것은 아니도록

내 삶의 자양분으로 더 더 화려한 꽃으로 피어나리라.

그리하여 진정 새로운 마음으로 거듭나되

본래 나를 잃지 않으리라.

눈물 나도록 눈부시고 따뜻하게.

  

"살아있는 동안, 빛나라.

그대여 결코 슬퍼하지 말라.

인생은 찰나와도 같고,

시간이 마지막을 청하게 되니."

- Seikilos Epitaph, <세이킬로스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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