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걷고, 읽고
강릉에서의 둘째 날은 신나게 먹고, 걷고 사색하는 시간이었다. 이튿날도 같은 기조를 유지하되,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책을 느긋하게 읽고 싶었다.
#토박이할머니 순두부집
조금 늦게 일어나서 아침의 여유를 즐기다, 초당마을에서 아점을 해결하기로 했다. 원래는 해물짬뽕으로 유명한 동화가든에 가려했으나, 줄이 너무 길고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빠른 포기를 했다. 구글 지도에서 맛집을 찾아보다 발견한 토박이할머니 순두부집에 갔다 (현재 리뷰 400여 개에 평점 4.2 정도다).
1인 9,000원인 순두부전골을 시켰는데 슴슴하고 구수한 맛이었다. 기본 반찬으로 나오는 콩비지도 맛있는데, 다 먹고 비닐봉지에 싸갈 수도 있다. 조미료 없는 담백한 맛인데, 그 전날 먹었던 차현희순두부청국장이 너무 맛있어서 이와 비교하면 평범한 맛으로 느껴지긴 했다.
#초당커피 정미소
순두부를 거하게 먹고 근처에 있는 카페인 초당 커피 정미소로 향했다. 이 근처에 툇마루가 꽤 유명하다는데, 줄이 매우 길어 보였으므로 (혹자가 웨이팅이 3시간이란다..) 역시 패스하고 적당한 차선책을 찾았다. 이 카페는 흑커피, 백커피, 누룽지 커피 세 가지가 유명한데 셋 중에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흑커피를 골랐다. 흑임자 가루를 포함한 여러 곡물가루가 섞인 라테인데, 고소한 우유랑 곡물이 꽤 어울렸다.
이전에 쌀을 도정하는 정미소를 카페로 개조한 것으로, 건물 뼈대가 보이는 인테리어가 성수동의 힙함을 떠올리게 한다. 커피도 맛있고,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공간이다.
#초당 타르트
흑커피를 마시고 테라로사 경포호수점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테라로사 바로 앞에 홍대 감성의 건물이 눈에 띄었다. 빵과 디저트를 매우 좋아하는 빵순이인데, 초당 타르트라는 간판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들어가 보니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힘든 메뉴들이 있어, 특이하다고 느낀 인절미 타르트와 오죽 타르트를 시켰다.
대나무 잎을 넣어 만들었다는 오죽 타르트는 깔끔 시원한 맛이었다. 일반적인 타르트와 달리 차가웠는데, 녹차 또는 말차 디저트와 맛이 비슷하면서도 특색이 있었다. 인절미 타르트도 고소하고 맛있었지만, 굳이 하나만 시켜야 한다면 별미인 오죽 타르트를 추천한다.
#테라로사 경포호수점
1일 2 커피는 커피의 도시 강릉에 대한 예의랄까. 타르트를 먹고 원 목적지였던 테라로사 경포호수점에 갔다.
첫째 날 테라로사 본점에 갔지만, 이 지점의 매력은 멋진 건축물, 그리고 2층에 위치한 한길서가에 있다. 회색 콘크리트 외벽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펼쳐진다. 1층은 수많은 레코드판과 책이 꽂혀있고 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핸드드립 커피를 시키고 나서 잠깐 1층과 외관을 구경했다. 100-200명은 족히 수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드넓은 매장은 내부는 회색 톤을 맞춰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냈고, 외부는 빨강, 파랑 등 원색을 넣어 생동감이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커피가 나왔고, 2층 한길서가로 향했다.
한길서가는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출판사 한길사의 책을 팔고 있는 곳으로, 인문학 책이나 소설이 주를 이뤘는데 감성적인 표지 디자인이 카페에 화사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었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는 인터뷰에서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책을 좀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 책이라는 것은 하나의 내용이지만, 형식도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했는데, 서가에 꽂혀있는 책들을 둘러보니 눈이 즐거웠다. 서가 감상을 조금 하다가 김 대표가 쓴 <세계서점기행>을 조금 읽었다. "서점은 도시의 어둠을 밝히는 불빛이다"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윌리엄 모리스의 인용구가 적혀있다.
예술이 창출한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름다운 집이라고 답하리라.
그다음은 무엇이라고 묻는다면
아름다운 책이라고 말하리라.
아름다운 집 안에서 향기로운 커피와 함께 읽는 아름다운 책. 테라로사의 김용덕 대표는 각 지점들을 커피와 책, 미술, 음악이 어우러지는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는데 경포호수점은 이런 철학을 잘 반영하고 있다.
#강문해변 및 안목해변 산책
아침부터 열심히 먹고 마셨으니 카페를 나와 좀 걷기로 했다. 테라로사에서 강문 해변까지 걷고, 그리고 강문 해변에서 소나무 숲을 거닐었다. 구름이 껴있었지만 바다는 여전히 파스텔톤으로 빛났고, 그 옆의 해송 숲은 시원한 공기를 뿜어냈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잠깐이나마 깊은숨을 들이쉬고 내뱉으며 삼림욕을 했다.
강문해변에서 안목해변까지는 거리가 좀 있어 안목까지 택시를 타고 움직인 후 조금 더 해변 감상을 했다. 지난여름, 날씨가 궂을 때 들렀던 강원도의 바다는 검푸른 색으로 무엇이든 덮칠 것 같았다. 파도가 거세서 입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바다가 이번 여행에서는 잠잠하게 은은한 빛을 쏘아 바라보는 이에게 차분함을 선사했다. 바다의 변덕스러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생각을 하고 있으니 조금 출출해졌다.
전날 차현희순두부청국장에서 옆 테이블에 앉아계셨던 토박이 할아버지의 추천 맛집인 머구리 횟집에 들렀다. 4층 규모의 으리으리한 횟집의 외관에 놀랐다. 조그만 가게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건물을 지어 올릴 정도라면 분명 장사가 잘 되는 맛집일 터다.
각종 모둠회를 팔았는데 혼자 먹기 알맞은 물회를 시켰다. 15,000원이라는 가격이 싸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웬걸. 혼자 왔는데도 정말 푸짐하게 미역국, 샐러드, 생선구이, 야채튀김 등등 2인 상 같은 밑반찬을 차려주셨다. 1인 여행객에게도 박하지 않은, 혼자 먹기 좋은 식당이라고 생각했다. 상큼하면서 시원한 소스와 버무려 먹는 물회도 일품이다.
#보사노바
머구리횟집에서 물회를 시원하게 먹고, 아메리카노와 마카롱 하나를 시켜 바다가 보이는 카페 보사노바의 루프탑에 자리를 잡았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다 바람을 맞으며 커피와 마카롱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책을 한 권 보기로 했다. 밀리의 서재 전자책 리스트 중 베스트셀러에 올라와있던 <1cm 다이빙>을 골랐다. 책에서 작가 두 명은 일상에서 '1cm 정도 벗어나' 누릴 수 있는 본인들의 최소확행 리스트를 공유한다. 그리고 독자에게 직접 본인의 '1cm 다이빙' 리스트를 작성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단순히 읽고 넘기는 책이 아닌, 저자들과 함께 생각해보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책이었다. 보사노바와 같은 카페에서 슥 읽기 좋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커피가 평균 이상으로 맛있었고, 루프탑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정말 예뻤다. 안목해변에서 워낙 유명한 카페라 사람들도 많지만, 자리만 잘 잡으면 꽤 여유롭게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다.
보사노바에서 책 한 권을 읽고 나니 어느덧 8시 경이되었고 주변이 꽤 어둑해졌다. 숙소에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서 시내에 있는 독립서점인 고래책방에 들렀다. 최근 생긴 것으로 보이는 세련된 통 건물의 각 층마다 콘셉트가 있는데, 문 닫는 시간이 한 시간 남짓 남았던 터라 강릉을 테마로 한 지하만 살펴보기로 했다.
지하는 강릉 출신 작가들의 책, 명소나 여행기 등 강릉과 관련된 책들이 즐비했다. 제주 올레길에 비해 잘 안 알려진 강릉 바우길에 대한 책, 동해안을 따라 걷은 <동해 바닷가 길을 걷다>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지하에 놓인 의자에 앉아 여행기를 조금 읽다 보니 어느새 마감 시간이 되어, 선선한 밤공기를 느끼며 숙소로 돌아갔다.
충분히 걷고, 먹고, 느끼고, 생각하는 하루를 보냈지만 내일이 여행의 마지막 날이라고 하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아쉬움이 있어 여행이 더 아름다운 것이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남은 여정도 옹골지게 보낼 생각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