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주 전 진행 중인 소송사건 의뢰인의 지인이라는 분으로부터 다급한 전화가 왔다. 의뢰인이 위독한 상태인데 임종면회자로 나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 다른 회의 일정이 있어서 바로 병원으로 이동하기는 어려웠고 병원의 위치도 제법 멀어서 회의를 마치고 병원으로 이동하면 3시간 정도 소요될텐데 괜찮겠냐고 여쭈어보니 그 정도 시간은 버틸 수 있으니 가능하면 병원으로 와주셨으면 좋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지병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난 11월에 있었던 변론기일에도 지팡이에 몸을 기대어 직접 출석을 하셨던 터라 이렇게 급격하게 상태가 악화된 것이 의아하고 안타까웠다. 한편, 병원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왜 임종면회에 나를 찾으셨을지 생각해보았는바, 현재 진행 중인 소송 사건이 걱정되었거나 혹은 소송물에 관한 권리를 타인에게 양도하고자 하시는 것은 아닐지 여러가지 생각을 하며 1시간 가량 차를 타고 부랴부랴 병원에 도착했다.
병실에 들어가기 전 임종면회자 명부에 이름을 기재하고 병실에 들어가보니, 의뢰인은 산소호흡기로 간신히 호흡을 유지하고는 있었지만 이미 몸이 앙상하게 말라서 앉은 자세를 유지하기 어려웠고 눈에도 초점이 없어 소리로만 인기척을 느낄 수 있는 수준의 상태였다. 의뢰인에게 가까이 다가가 내가 도착했음을 알리고 손을 잡은 뒤 이렇게 병실에서 만나게 된 점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의뢰인의 눈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지만 내가 잡은 손에 화답이라도 하듯 잡은 손에 지긋이 힘을 주어 인사를 대신했다.
한편 의뢰인은 호흡저하가 심하여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상태였기에 간호사가 전달해준 클립보드와 이면지에 마지막 힘을 내어 몇가지 단어를 적었고, 동거인에게 몇 가지 재산을 남기겠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으로 보였기에 즉석에서 자필로 A4용지에 권리양도증서를 작성한 뒤 서명을 도와드렸다(이러한 문서의 법적효력은 별론으로 하고 의뢰인의 마지막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임종면회자로 나를 부르셨던 이유가 위와 같은 재산정리를 위해서였던 것으로 생각하였기에, 비록 어설프지만 관련 업무를 처리한 뒤 자리를 비켜드려야 할 것 같아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병원을 떠나려할 때였다.
나로서는 의뢰인과 사건에 관한 소통만 하였을 뿐 어떤 인생을 살아오셨는지 알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의뢰인이 어떤 감정상태일지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기에 어떠한 말로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 지 고민이 되었지만, 평소 죽음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담아 의뢰인의 앙상해져버린 손을 지긋이 부여잡고 짤막하게 인사를 드렸다.
"이제 주어진 시간이 다 되었나봅니다. 부디 평안하십시오."
그리고 한 마디 말을 더 보탰다.
"저희 직원들이 선생님 참 좋아해요"
그 말을 들은 의뢰인의 얼굴에는 세상에 둘도 없을 정도로 환한 미소가 번졌다. 미소라기 보다는 황홀함에 취한 표정이라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이미 모든 기력이 다 소진되어 안구에 초점을 잃은 상태에서도 그와 같이 환한 미소를 짓는 의뢰인의 얼굴을 보며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의뢰인께서 임종면회자로 나를 불렀던 이유가 어쩌면 업무상의 목적이 아니라 그저 내가 보고 싶으셨던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의뢰인은 생전에도 종종 사무실에 방문하셔서 직원들 먹을 빵을 사다주시거나 소송 외의 일상문제에 대한 대화를 나누곤 하였기에 비교적 살가운 관계를 유지해왔다)
병실에 방문했을 당시 의뢰인의 침대 빈 공간에 놓여있었던 클립보드 위 이면지에는 힘 없는 필체로 여러 개의 글자가 겹쳐져 "여의도 정현석 변호사"라는 글자가 적혀져 있었고, 의뢰인은 내가 병원을 떠난지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돌아오는 차안, 어두운 밤길을 운전하며 문득 들었던 생각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에게 가장 위안이 되는 말은 복잡한 철학도, 종교적 가르침도 아니요, 그저 당신은 좋은 사람이었고,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소박한 사실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나를 기억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나의 존재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어야 할 이유임에 더하여 죽음 앞에서도 미소를 짓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목도하였기에 기록으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