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십리터 Jun 08. 2020

사람은 미워해도 돈은 밉지 않다

미국의 자본주의

한 달 미국여행 후 느낀 점 100가지 중

10.미국의 부유함은 숨길 일이 아니며 때론 부유함 자체가 관광자원이 된다

25.한국은 그다지 철저한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다

26.기부는 부를 품위 있게 자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27.미국에선 명품이나 브랜드 제품을 갖기 쉽다. 흔하니까

40.미국에 공짜는 없지만 기부는 있다. 누군가의 기부가 있다면 나에겐 공짜가 되기도 한다

46.약국은 약만 파는 곳이 아니다

61.LA에는 의외로 관광지가 없다


미국엔 '부(rich)'가 흔하다.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 중심가, 변두리 부자들의 별장, 이름 알만한 명품숍, 심상치 않은 자동차, 하다못해 길거리 평범한 빵집의 가격표.

대충 봐도 비쌈이 즐비하다.

타임스퀘어의 비싼 광고판. 비싼 광고만큼 많은 소비가 이루어지는 현장.

비싼 물건을 소유하는 일이 딱히 특별하지 않다.

아웃렛이 대중적이라 명품과의 거리가 가깝다.

나이키나 아디다스 정도의 다소 비싼 브랜드는 찐이든 짭이든 많이 입고 다닌다.

허름해 보이는 백화점에서 지하상가 보다 조잡한 디스플레이로 명품을 늘어놓고 판다.

시장 옆이나 공장 옆을 지나가다 우연히 디자이너 브랜드의 창고세일을 목격한다.

창고세일과 같은 쇼핑 현장은 마치 전쟁 같다.

아웃렛이나 창고세일에선 비싸서 갖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물건이 현실적인 가격으로 눈앞에 다가온다.

남녀 구분만 있는 천막만 대충 두른 공용 탈의실에 수십 벌씩 옷을 들고 가서 전투적으로 맞는 사이즈를 골라낸다.

400달러짜리 원피스에 100달러 텍이 붙어 있으니 이건 원래 내가 사려던 물건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미국에선 일 년 내내 그런 소비행위가 벌어진다.

여행 기간이었던 블랙프라이데이에서 크리스마스 사이는 체험 간접소비 현장이었다.

싸다고 착각해서 사고, 비싸도 사고, 더 비싼 물건이 자꾸 보여서 사고 싶고, 보다 보면 돈을 쓴다.

월급이 아닌 주급을 받는 사람들에게 계획적인 소비는 조금 먼 나라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소비를 돈으로 단순하게 연결한다면 미국엔 정말 많은 돈이 존재하는 셈이다.

그렇다.

미국엔 돈이 굴러다닌다.

하지만 그 돈이 내 발에 챈다고는 안했다.

그 돈은 누구 돈인가?

부자들의 돈이다.

뉴욕 크리스마스마켓에서 세계적인 은행 시티뱅크가 코코아를 나눠줬다. 당장 백달러도 없는 미국인이 많은데 저 은행 금고의 돈은 누가 가지고 있을까?

미국에서 흥미로웠던 공간 중 하나가 편의점이다.

편의점은 쉽게 구해야 하는 물건, 자주 구입 해야하는 물건을 파는 공간이다.

자연스럽게 그 나라 사람들의 생활상이 투영된다.

한국의 편의점엔 점점 수준 높은 간편식이 늘어난다.

동남아의 편의점도 일본이나 한국의 편의점과 흡사하다.

반면 주말이면 마트도 쉬어야 하는 유럽에선 편의점이란 개념 자체가 희미하다.

일본 여행이 유행하던 초기에 오직 편의점과 드러그스토어에 가기 위해서 일본행 비행기표를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편의점에서 가성비 좋은 간편식을 경험하고, 드러그스토어에서 약은 아니지만 약과 같은 효과를 주는 물건들을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편의점은 그런 드러그스토어를 합해서 전문성을 곁들인 느낌이다.

미국 편의점은 진짜 약을 판다.

샌드위치와 콜라도 팔지만 그 옆에서 약도 판다.

규모가 큰 편의점에는 전문 약사도 있다.

약의 종류도 무척 많다.

평소 타이레놀만 세종류를 먹는 나도 미국 편의점에서 파는 색색의 타이레놀 포장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기본, 야간용, 하얀색, 파란색 등등 타이레놀 하나가 매대 하나를 가득 채운다.

약은 약사에게라는 문구를 낳은 의약분업과 편의점에서 상비약 하나 파는 것도 논란이 되었던 한국과는 비교된다.

무엇이 그들에게 약을 팔게 했을까.

의료보험 제도 때문에 병원은 꿈도 못 꾸는 사람들이 편의점에서 파는 약으로 버티기 때문이다.

의사가 없으니 약이 있다.

미국의 부실한 의료보험은 유명하니 내가 할 말은 없다.

당장 오늘을 살 돈을 벌기도 힘든 미국인에게 내일을 살기 위해 병원을 찾는 건 어불성설이다.

편의점 매대 위 수 많은 약물에 비친 미국은 선진국이라고 불리기엔 조금 힘들어 보였다.

한국에선 복지 문제를 거론하면 자본주의 폐단이라는 말이 함께 등장할 때가 많다.

미국의 의료보험 이야기는 딱 그런 예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돈과 부를 부정적으로 여긴다는 느낌은 별로 못 받았다.

돈이 많아서 쓰는 것도, 돈이 없어서 죽는 것도 그냥 자본주의의 흐름이자 일부로 느끼는 것 같다.

부유함 자체를 부정하면 미국이란 국가의 체제가 흔들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국이나 북한이 자본주의 체제를 물밑에서 구축하면서도 인정할 수 없는 이유와 비슷하다.

반면 한국은 아주 쉽게 돈을 욕한다.

부를 부정하는 것을 보면 한국은 그다지 철저한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구나 싶다.

미국이란 자본주의 그 자체

물론 나는 이런 일에 관심이나 흥미, 심지어 전문 지식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해 경제학자와 앉아 진지하게 이야기해본 것도, 제대로 공부해본 적도 없다.

다만, 넘치는 실업자와 노숙자, 비정상적인 위치로 올라간 물가, 기울어진 부의 분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럭저럭 살고 있기에 그렇게 느꼈다.

여전히 미국에는 이민자와 밀입국 하는 사람들이 넘친다.

분명 눈에 보이는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

나로서는 그저 다수의 불만을 씹어 먹을 정도로 돈이 많이 존재해서 그런가 하고 추측할 뿐이다.

미국에 비하면 한국은 자본주의 국가라고 부르기 힘들지도 모른다.

유교 문화의 영향 때문인지 종종 이유 없이 부자를 경계하고 미워한다.

드라마에 재벌이 나오면 착하게 굴어도 뭔가 나쁜 사람일 거라고 생각한다.

로또는 되고 싶지만 돈은 더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모순이다.

공산주의 국가와 대치 중인 상황임을 생각하면 더 희한하다.

북한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누구보다 맹렬하게 공산주의식 경제체제를 부정해야 하는데 역설적이다.

북유럽의 복지를 부러워하면서 북유럽 국가들이 사회주의 체제란 사실에는 놀란다(물론 북유럽의 사회주의는 북한과는 아주 다르지만).

한국의 자본주의는 어딘가 어설프다.

샌디에고 해변의 모레성. 옆에 버킷을 놓고 만드는 사람이 있다. 미국에선 모래성의 낭만도 돈을 내고 느낀다.

아무리 문제가 많다지만 미국에서 부유함은 숨길 일이 아니다.

때때로 부유함 자체를 전시하고 관광자원으로 삼기도 한다.

한국 밖에서 한국과 가장 연관 있는 지역이라면 역시 LA다.

다른 나라에선 보기 힘든 거대한 한인타운도 있고, 비행기도 많이 뜬다.

LA에 사는 고모, 이모, 삼촌, 친구, 아는 사람 한 명 정도는 흔하다.

아무도 몰라도 최소한 LA갈비는 안다.

갈비는 분명 한식인데 LA+갈비다.

로스앤젤레스도 아니고 친근하게 약어로 LA라고 부른다.

다른 지역은 뉴욕, 샌프란시스코라고 불러야 하지만 LA는 LA다.

자연스럽게 관광도 많이 간다.

많이 들어봤으니 볼 것도 많은 것 같다.

그런데 LA에는 의외로 관광지가 없다.

오죽하면 한인타운이 관광지다.

헐리우드가 유명하지만 거기서 영화를 찍으려는 게 아니라면 짧은 길거리일 뿐이다.

각종 비치라는 이름이 붙은 바다도 유명하긴하다. 

하지만 극기훈련식 여행이 익숙한 한국인은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관광 끝이다.

자, 헐리우드 바닥에서 연예인 이름 찾고, 산타모니카 해변에서 사진도 찍었고, 유니버셜 스튜디오도 다녀왔고, 한인타운에서 순두부도 먹었으며, 라라랜드 나온 거기서 별은 안 보이지만 야경은 봤다.

패키지식으로 가면 하루 만에도 끝낼 수 있는 코스다.

한국식 여행자는 보통 LA를 하루 이틀 만에 둘러보고 몇 시간씩 떨어진 다른 지역으로 떠난다.

소문난 LA에 의외로 갈 데가 없다.

그런 LA에서 눈에 띄는 관광지가 있다.

바로 게티센터와 게티빌라다.

LA 게티센터. 잔디밭에서 보이는 하늘과 스카이라인까지 모두 무료 관람!

석유 재벌 폴 게티의 개인 소장품과 기금으로 조성한 문화단지다.

게티센터 공사비가 1조 원이 들었다던가.

석유, 재벌, 1조.

뭐 하나 친밀한 단어가 없다.

모노레일을 타고 게티센터가 있는 산에 올라가면, 고흐의 아이리스 같은 유명한 그림은 기본이고, LA 전체 전망까지 보인다.

잘 가꿔진 잔디밭과 정원만 있어도 하루 종일 놀 수 있다.

그런데 이게 다 무료다.

트램도 미술품도 정원도 전부 프리다.

문화의 아크로폴리스라고 불릴 정도로 가치 있는 공간인데 공짜다.

무료인 날을 정해둔 게 아니고 매일매일 무료다.

사람들은 재벌의 집과 정원을 구경하러 간다.

미술품은 덤이고 내가 살아 보긴 힘든 화려한 저택이 궁금하다.

부유함 자체가 관광상품이다.

돈이야말로 미국다운 관광자원이 아닐까?

만약 플랜더스의 배경이 LA고, 네로가 보고 싶어 한 그림이 게티센터에 있었다면 애니메이션이 덜 비극적이었을지도 모른다.

게티센터에 비해 접근성이 떨어져서 잘 안가는 게티빌라도 무료 관람

미국에 공짜란 없다.

편의점 앞에서 노숙자들이 자동문 행세를 하며 문을 열어주고 팁을 요구할 정도다.

돈 없이 이뤄지는 행동이란 없는 미국이지만 공짜가 되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기부다.

누군가 기부하면 나에게 공짜가 되어 돌아온다.

엄밀히 말하면 공짜는 아니다.

누군가는 비용을 지불하는 행동이니까.

노블레스 오블리주.

높은 사회적 신분에 합당한 행위.

외우기 힘들어서 그런지 멋있는 말이다.

돈에 관련된 일만 말하는 건 아니지만, 이 말에서 자연스럽게 기부가 연상된다.

미국의 부유층은 기부도 많이 한다.

게티 센터나 게티 빌라 같은 건물도 아무나 와서 보라고 떡하니 내어준다.

오페라 티켓도 기부하는 사람이 있어서, 운이 좋으면 수십만 원 짜리 오페라 티켓도 공짜다. 

기부는 부자를 품위 있어 보이게 만드는 혁신적인 도구다.

가난한 자가 아니라 부자를 위한 시스템이다.

이런 고급진 시스템을 어떻게 개발했나 싶다.

이토록 부자를 우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도구라니.

언젠가 브로드웨이 뮤지컬 로터리 티켓이 당첨되듯 저 부자가 나한테 돈을 던져줄 것 같은 착각을 만든다.

자본주의가 낳은 매력적인 상생의 도구다.

어느 뉴욕 부자댁을 미술관으로 만든 프릭컬렉션. 기부입장이 있는 날에는 입장료 대신 원하는 만큼 기부금을 내고 들어간다. 미국에서 기부는 캐주얼한 개념.

나는 어쩐지 미국인들이 돈 자체를 싫어하게 될 일은 없을 것 같다.

돈 대신 미워할 핑곗거리를 만들겠지.

뭔가 다른 문제로 자본주의와 돈, 부라는 근본적 문제를 가릴 것 같다.

지금 미국의 시위도 그 근본을 따지면 자본주의가 문제다.

대규모 농장과 공장을 돌려 자본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지 않던 흑인을 데려왔다.

흑인노예가 만든 자본은 아직 그들에게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흑인 대통령이 나왔어도 그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교육의 기회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결국은 돈이 문제다.

자본은 미국을 논할 기본 논리다.

당연히 좋은 이야기보다는 나쁜 이야기가 할 말이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찌되었든 그들이 돈을 미워하진 못할 것 같다.

자본의 흐름이 아닌 주변의 다른 문제를 먼저 개선하겠지.

아무튼 그곳엔 언젠가는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으니까.

라스베가스  스트립. 돈을 얻기 위해 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


매거진의 이전글 미국에서 먹어야 하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