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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Aug 01. 2020

에그슬럿이 비싼 이유

미국의 물가

미국 여행의 가장 큰 장애물은 열악한 대중교통도 아니고, 대마와 합법 총기가 판을 치는 치안도 아니며, 수능 듣기 평가 1번 문제부터 틀렸던 말 못 할 영어실력도 아니었다.

미국 여행의 걸림돌은 물가였다.

스위스에서 남다른 호텔 가격에 기겁도 해봤고, 노르웨이에서 택시비보다 비싼 버스요금을 내면서 욕도 해봤고, 카타르에서 에비앙 두 병을 집어 들고 환율 계산을 하다 포기도 해봤다.

이제 더는 물가가 비싸다는 이유로 놀랄 일은 없을 줄 알았다.

왜 그랬을까.

왜 나는 미국 물가가 비싸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뉴욕 Keens 스테이크하우스의 계산서. 영수증 Bad 그 자체...

최근 코엑스에 핫한 식당 하나가 오픈했다.

에그 슬럿(Egg Slut).

LA를 여행 한 사람이라면 이름을 들어봤을 가게다.

별거 아닌 시장의 상점 하나가 뭐라고 며칠간 인터넷이 뜨거웠다.

자연스럽게 기사를 클릭하고 메뉴와 가격을 봤다.

사진만 봐도 에그슬럿이 본토의 매장을 그대로 옮겨왔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물론 맛은 모른다.

가격을 그대로 가져왔다는 뜻이다.

에그슬럿 본점이 있는 LA 그랜드센트럴마켓

에그슬럿 이전에 쉑쉑버거와 블루보틀 같은 프랜차이즈가 들어올 때도 항상 가격 이야기가 화제가 됐었다.

하나 같이 비싼 가격 때문에 이슈가 됐었다.

미국에서 오는 브랜드들은 딱히 대단한 것 없어 보이는 빵 하나도 하나같이 비싸다.

왜 그럴까?

사업자 입장에서 보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미국을 여행했던 사람 입장에서 말하면 답은 하나다.

미국에서는 그게 평범한 가격이다.

한국인들이 비싸다고 욕하는 가격이 미국에선 보통의 존재다.

물론 미국 물가가 비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각오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여행을 준비하던 중에도 눈이 돌아가는 경험을 했다.

첫 번째 멘붕은 숙소를 고르는 과정에서 왔다.

뉴욕 중심가의 호텔. 여기서 숙박했다면 여행 일정이 반의 반으로 줄었겠지?

렌트비로 악명 높은 런던에서도 눈을 낮춰서 한인민박을 고르면 비교적 저렴한 방에서 잘 수 있었다.

하지만 뉴욕의 숙박비에는 자비가 없었다.

평범한 호텔도 동남아에서 풀빌라를 빌려서 룸서비스까지 이용할 가격이었다.

열흘 넘게 뉴욕에서 머물러야 하는 내 처지에 호텔이라고 이름 붙은 곳은 일단 생각의 범주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 유스호스텔에 가자.

시내버스 요금이 만원에 육박하는 노르웨이에서도 조식 포함한 깨끗한 시내 중심의 호스텔이 오만원을 안 넘어갔잖아.

뉴욕에서는 넘어갔다.

호스텔이라고 해도 위치, 교통, 시설이 조금 좋으면 동남아의 호텔비를 넘어섰다.

숙박비 때문에 비상이다 비상

침착하자.

싫지만 한국인에게는 한인민박이 있다.

불법 영업이지만 가격 면에서 경쟁력을 갖춘 한인민박이라면 저렴하겠지.

아니었다.

뉴욕의 한인민박은 총체적으로 불법 같았다.

아침부터 닭 한마리를 삶아주던 로마의 민박이나 밤마다 삼겹살을 무한리필해주던 파리의 민박은 기대도 안 한다.

커튼이나 판자로 대충 막아서 사람을 꾸겨 넣는 데만 치중한 수용소 같은 분위기인데 짐 하나도 맡기지 못한다.

숙박업소의 기본도 지키지 못하면서 가격은 호텔과 다르지 않다.

한국인이 기대하는 정이 있을 환경도 아니었다.

결국 내가 선택한 건 뉴욕여행자들이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할렘가 근처의 호스텔이었다.

샌디에고의 유명한 고급 호텔, '호텔 델 코로나도'. 물론 내가 숙박 못 할 가격!

이쯤에서 눈치를 채야 했다.

미국 여행에서 지갑을 열 때마다 내가 멈칫할 것이라고.

유럽도 물가가 비싸지만 머리를 굴리고 아끼면 지출이 줄어드는 부분이 있다.

미국여행도 비슷할 줄 알았다.

아니었다.

미국여행은 저렴한 부분이 없다.

쉴 틈 없이 돈이 빠져나간다.

돈이 이렇게 빨리 사라지는 이유를 생각해봤다.

자주 쓰기 때문이었다.

내 지갑을 얼려주겠니 엘사? (뉴욕 삭스백화점의 디피)

미국에서는 돈을 써야 하는 빈도수 자체가 많았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생존을 위한 행위는 당연하고, 걸어 다니며 마주치는 누군가의 호의 하나에도 돈이 든다(편의점에서 문 열어주면서 돈 달라고 하는 노숙자도 있다).

심지어 모든 계산은 두 번에 걸쳐 일어난다.

'팁' 문화 때문이다.

그래, 팁.

팁이 문제다.

미국에서 돈을 쓰는 것보다 머리 아픈 일은 팁이었다.

망할 팁문화는 도통 익숙해지지를 않았다.

주기 싫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말 팁을 얼마나, 어떻게 줘야 하는지 몰라서 못 준다.

TPO에 따라 옷이 달라지듯 팁도 계산 방법이 다르다.

저렴한 곳에서는 팁도 조금, 비싼 곳에서는 팁도 많이, 계산 방법에 따라, 시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날짜에 따라, 사람에 따라, 심지어 기분에 따라서 달라진다.

문제 : 뉴욕 최고의 전통을 자랑하는 롬바르디 피자 작은 사이즈와 콜라 한 잔을 먹고 내야하는 돈을 구하시오.

그냥 동남아의 매너팁처럼 1달러로 해결된다면 신경도 안 쓰겠지만 미국의 팁은 아니었다.

1~2달러에 연연하고 싶지 않았지만 팁의 단가가 10~20달러에서 시작했다.

분명 한 끼를 먹었는데 팁을 계산하면 두 끼 정도 먹는 효과가 난다.

높은 가격보다 무서운 건 적절한 팁을 계산할 줄 모르는 내 못난 머리였다.

팁을 낸다는 말은 물건 가격에서 적정 수준의 비율로 팁의 액수를 도출해야 한다는 뜻이다.

숫자라면 구구단도 싫어하는데 돈을 쓸 때마다 계산을 해야한다니.

계산은 가격표랑 계산기가 해야지.

이게 수학책에서 멀쩡한 달력 찢어서 계산 시키는 일과 뭐가 달라.

팁 계산기 어플도 깔아봤지만 무용지물이다.

세금을 제외한 가격에서 계산해야 하고 상황에 따라 다르게 책정해야 하므로 어차피 머리를 굴려야 한다.

실제로 돈을 내야 하는 상황에서 순간적으로 판단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계산하는 매 순간 수능 수학 문제를 풀 때 보다 치열하게 머리를 써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있는 그대로의 가격만 계산하면 되는 맥도날드와 편의점이 좋아졌다.

택시를 타지 않은 이유도, 궁금했던 레스토랑에 가지 않았던 이유도 팁 계산이 골치 아파서였다.

뉴욕의 할랄가이즈는 맛보다 가격 때문에 인기있는게 분명해

미국의 물가가 아무리 비싸도 내가 한 일주일쯤 머무르는 단기 여행자였다면 크게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한 달 정도를 다니다 보니 사정이 달랐다.

대마초와 노숙자가 깔린 길에서 노숙할 수 없으니 어디라도 숙소를 잡아야 하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달을 굶을 수는 없다.

돌바닥에서 노숙하기는 좀...

기본적인 의식주만 챙겨도 주머니가 빠듯하다.

그러려니 했지만 순간순간 울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이 재미있어서 짜증이 났다.

여행자에게 잔인할 정도로 여행물가가 비싼데 갈 데가 많다.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피노키오 코가 길어진 이유 :  입장권 12만 5천 9백원인데 싸다고 거짓말 함

아메리카 대륙이다.

미서부의 요세미티와 그랜드캐년 같은 대자연을 시작으로 뉴욕이란 세계 최고의 도시 속 갖가지 모험까지 죽기 전에 한번은 보고 싶은 것들이 모두 거기에 있다.

좋은 상황에서만 좋은 게 아니라 모든 상황이 흥미로웠다.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대국이 흘러가는 시스템과 오류, 부작용, 관광객에게 보여주는 자원들.

지갑이 털릴 때 마다 영혼은 충만해졌다.

미국 여행은 카드명세서 만큼이나 강렬했다.

미국여행은 그랬다.

영수증을 보면 집어치우고 싶지만 사진을 보면 언제 다시 갈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되는 여행이었다.

돌아오는 길, 샌프란시스코 공항 라운지의 맥주. 또 마시고 싶은 걸 어쩌겠어

미국여행 후 느낀 점 100가지 중

5.미국 물가는 북유럽, 스위스 등등 전부 싸게 느껴질 정도로 비싸다

57.미국에서, 특히 뉴욕이나 샌프란시스코에서 들어온 프랜차이즈가 비싼 이유는 거기선 그게 평범한 가격이기 때문이다

72.머리 나쁘면 팁도 못준다

96.여행하기에 너무 비싼데 갈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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