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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Feb 08. 2021

아침밥은 안 먹지만 조식은 먹습니다

조식 : 여행 중 먹는 당일의 첫 끼

‘조식’

아침밥도 아니고 Breakfast도 아닌 한자어. 그 정체성 없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다 깜짝 놀랐다.

‘조식[粗食] : 음식을 검소하게 먹음. 또는 그러한 음식.’

내가 기대한 뜻은 ‘조식[朝食]’이었다. 그런 당황스러운 한자를 쓰는 조식이 있을 줄은 몰랐다.

동남아 호텔의 조식 뷔페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한국인이 쓰기에는 부적절해 보이는 뜻이다.

트립어드바이저 상위 랭킹 웨이팅을 뚫고 앉은 식당에서 주문한 메뉴를 기다리는 자의 경건함

뭐, 상관없다. 사전적 정의는 집어치우고 나는 조식을 이렇게 새로 정의한다.

‘여행하는 중에 먹는 당일의 첫 끼.’

여행지에서 눈을 뜨고 처음 먹는 그 음식이 조식이다. 시간도 메뉴도 상관없다.

내 인생의 내적 갈등 중 식탐과 수면욕이 충돌하던 어느 날, 장렬하게 식탐 쪽이 졌다. 아침에는 잠이 제일 급해서 아침밥은 초등학교 때 이미 때려치웠다. 하지만 여행 중에는 조식을 먹는다.

끼니를 챙기는 시간이 불분명해서 때로는 새벽, 때때로는 11시 59분에도 먹는다. 아침밥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하니, 다소 낯선 단어 조식이라고 칭해본다.

여행 중 먹으면 조식이기 마련이니까. 고로 나는 아침밥은 안 먹지만 조식은 먹는 사람, 아니 그런 여행자다.

그렇다고 조식을 꼭 먹는 건 아니다. 숙소에 포함되어 있다면 챙겨 먹는 정도다.

메뉴도 다양하다. 파리 한복판 한인민박에서는 아침부터 삼계탕이나 잡채를 먹으며 도시의 정체성을 고민한다.

주 가끔은 분명 오늘의 첫 끼인데 식탁에 맥주나 와인이 올라오는 일도 있다.

1박에 5만원 정도 했던 호치민의 작은 호텔에서 기본으로 나오는 깔끔한 조식.

내가 다니는 숙소는 대부분 저렴한 유스호스텔이라 별로 대단한 진수성찬이 나오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먹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든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호스텔의 기본 조식은 공통으로 식빵에 달걀, 커피가 기본이다. 과일과 치즈가 곁들여진다면 부실하다는 생각은 멀어진다.

미국과 대만의 호스텔에서 먹은 조식들

가끔 별을 단 호텔로 넘어가면 조식 메뉴 구성과 세팅이 완전히 달라진다. 보통 화려한 뷔페가 차려진다. 이때 뷔페 레스토랑에서 가장 열심히 접시를 나르는 사람들은 대게 한국인이다.

알함브라 파라도르에서 먹은 조식. 알함브라 궁전 뷰라는 치트키가 특별한 조식을 줬다.

조식이라고 항상 숙소에서 먹지는 않는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먹기도 하고 유명한 식당을 찾아가기도 한다.

스페인에서는 츄러스가 아침밥이 된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방금 튀긴 따끈한 츄러스에 초콜라떼에 에스프레소가 있다면 성공한 아침

뉴욕에서는 뉴요커처럼 베이글과 아메리카노를 먹어보겠다고 그 엄청난 맨해튼의 출근 시간에 베이글을 사러 가기도 했다.

조식이지만 연어, 아보카도, 크림치즈가 가득한 샌드위치를 선택한다

도시 여행 중이라면 브런치 카페를 찾는 즐거움도 크다.

좋은 브런치 카페가 많은 호주에서는 복작거리는 카페에서 아침부터 웨이팅까지 걸고 팬케이크와 플랫화이트를 먹었다.

시드니 한복판에서 여유롭게 브런치

뉴욕에서는 섹스앤더시티의 로망을 이루기 위해 기어코 사라베스에서 브런치를 먹었다.

각종 술을 바라보며 먹는 사라베스의 브런치

특별한 장소에서 조식을 먹는 일도 생긴다.

기내식은 말하자면 하늘 위에서 먹는 조식이다. 공항 구석에 찌그러져서 요거트로 대충 때우기도 한다.

스크램블+빵이라는 전형적인 기내식 조식, 아침에 먹으면 조식이고 오후에 먹으면 간식인 평범한 요거트.

서점이나 공원에서 무언가 우물거리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핀란드 헬싱키의 서점 안에 있는 카페 알토의 한 끼, 밥 친구는 모르는 글자로 쓴 책들.

야간 기차를 타고 비몽사몽인 아침에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이층 침대 양쪽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승무원이 갖다 주는 빵을 우물우물 씹으며 눈곱과 함께 정보교환을 하기도 한다.

또는 야간 기차를 타고 달리다 또 버스를 타고 한참 나타난 산속의 호젓한 마을에서 환상적인 배경을 보며 쌀국수를 먹는 희한한 사태도 벌어진다.

사파에 도착한 새벽에 이런 쌀국수를 먹는데 배경이...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것들이 자욱한 마을을 보며 조식과 함께 차 한잔

기차나 배와 같은 운송수단에서 조식을 먹는 일도 종종 있다.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탈 때는 눈을 뜨면 시차가 바뀌니 언제 먹어도 조식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런 크루즈선에서 가벼운 뷔페를 먹기도 한다

핀란드에서 스웨덴으로 넘어가는 카지노까지 있는 고급스러운 크루즈 안에서 먹기도 하고, 다소 허접한 배 위에서 해가 뜨기도 전에 수북이 쌓인 식빵을 집어 먹기도 한다.

미얀마에서는 해 뜨기도 전에 밀항하듯 이런 배에 타서 선원이 무한정 구워주는 식빵을 집어 먹으면 점점 해가 뜬다
식빵을 먹다 정신차리면 일출이 보이고, 눈도 못뜬 여행자들이 일어선채로 식빵을 주워 먹은 흔적만 남아 있다

집에서는 아침에 눈만 떠도 속이 메스꺼운데 나는 왜 그토록 조식을 챙겨 먹을까.

나는 그 아침에 밥을 먹는 게 아니다. 여행자들이 준비하는 아침 분위기를 먹는 거다.

특히 호스텔 조식당에는 호텔과는 전혀 다른 특유의 분위기가 있다. 그건 저녁과는 또 다르다.

각자의 일정을 살피며 신나고 들떠 에너지를 와구와구 채우는 그 순간에만 느껴지는 특별함이 있다.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여행자만이 내뿜는 기운이다.

전 세계에서 모인 나이, 인종, 피부색 뭐 하나 공통점 없는 사람들이 다 같이 토스트를 구우며 각자의 언어로 떠드는 그 시간의 사랑스러움을 어찌 피해 갈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각자의 흥분을 표현하는 그곳에 우울함을 끼어들 틈이 없다.

나는 복작거리는 조식당에 혼자 앉아 그 기를 받는다.

혼자 여행을 떠날수록 절실한 활기가 그곳, 그 시간에 있다.

그래서 여행은 아침에 커피를 투약하고도 잠에서 깨지 않는 날과 전혀 다르다.

먹는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

평소에 먹기 싫은 아침밥이 먹고 싶다는 건 그날을 살고 싶다는 것,

여행에서만 아침이 먹고 싶다는 건 여행이 나를 살게 한다는 것.

그래서 조식을 먹는다는 건 나에겐 여행의 시작이고 삶의 시작이다.

포르투에서 먹은 브런치가 최고였던 이유는 스치는 여행자 A에 불과한 나에게 한 끼 식사를 주며 진심으로 친절했던 주인이 기억 나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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