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여닫은 문들
주먹을 쥔다.
통 여행을 안 했더니 다소 짧고 퉁퉁해진 손이 도라에몽 같다. 도라에몽과 나의 공통점은 별걸 다 가지고 다닌다는 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똑똑한 로봇이 배에서 꺼내 드는 물건은 하나같이 20세기에 태어난 내 생전에 등장하긴 틀린 외계의 것들이었다. 욕심도 오를만한 나무여야 생기는데 지나치게 현실과 동떨어진 도라에몽의 도구에는 부럽다는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딱 하나, '어디로든 문'만 빼고.
직관적인 이름 그대로 가고 싶은 곳 어디로든 연결해주는 그 문이 너무 탐났다. 그 문 하나를 가지고 별별 생각을 다했다.
이것만 있으면 출퇴근 길 신도림이나 종로3가 환승 지옥에서 '이럴 바엔 차라리 그냥 지옥에 가는 게 나을 거 같은데'라는 착각에 빠질 필요 없겠지.
비행기 퍼스트클래스 요금을 받고 재벌들 해외 출장길을 열어 줄 수도… 아냐 차라리 항공사 대신 문공사를 하나 차리자. 재벌 특혜 논란이 생기면 미담을 만들어서 이미지 세탁을 하자. 지구 반대편에 계신 부모의 임종을 지키고 싶다는 사람들을 순식간에 데려다주는 거지.
이런저런 상상이 가능하지만 역시 그 문이 있다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쓰고 싶다.
아무도 모르게 내 일상에 여행을 찔러 넣기 위해서.
백수 생활이 지겨운 날에는 문을 벌컥 열고 뉴요커들의 아침에 섞여 들어가, 베이글과 아메리카노 한잔을 사서 남의 출근을 구경하는 거지.
쌀쌀해지는 날씨가 다가오면 호다닥 베트남으로 넘어가 쌀국수 한 그릇을 호로록 털어 넣고 땀을 두어 방울 매단 채 돌아오고.
길에서 동전을 주운 날이면 로마로 넘어가서 트레비 분수에 던지고 오자.
하루에도 열두 번씩 여행을 떠날 수 있어.
그래.
문 열기는 여행과도 같다.
문은 통로니까, 문을 열면 어디로든 도착한다.
인류가 움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이후 인간의 영역에는 항상 문이 존재했다.
캐리어 문을 닫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여행이 시작된다.
매일 열고 닫는 방문, 엘리베이터문, 차문이 아닌 뭔가 새롭고 특별한 문을 여는 일을 여행이라고 부른다.
처음 마주한 세상에서 모르는 문을 열 때마다 그 뒤에 있을 미지를 상상하는 맛이란 어쩜 그렇게 오감을 짜릿하게 만들까.
문에는 특별한 은유와 역할이 있다.
12시가 되면은 닫는 동동 동대문은 보물 1호, 남대문은 무려 국보 1호다.
보물도 국보도 모두 문인 나라에 살아서인지 나는 여행에서 마주치는 문들이 특별하게 느껴진다.
흥선대원군이 애써 닫으려 했던 나라의 문을 열고 해외로 나가면 마주치는 문들 말이다.
나는 여행 중에 참 많은 문을 열고 닫고, 넘어갔다.
문은 그 자체로 문화이고 역사다. 하나의 문이라도 여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일단 파리의 개선문이 그렇다.
엄청 낭만적일 것 같지만 사실은 좀 더러운 샹젤리제를 따라가면 나오는 이 문은, 이름에서 느껴지듯 전쟁과 승리의 역사 위에 세워졌다. 나폴레옹 입장에서 그렇다.
전쟁에서 희생당한 평범한 사람들에겐 천국 또는 지옥이 문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개선문에는 추모의 공간이 함께 있다.
나폴레옹이 남의 나라 이야기인 관광객 입장에서 본 개선문은 파리를 가장 파리답게 보여주는 전망대일 뿐이다.
나와 달리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지 파리에는 개선문 두 개가 더 있다.
먼저 만든 두 개의 개선문이 전쟁의 역사와 군사를 상징한다면 라데팡스의 신개선문은 좀 더 현대적 의미의 승리를 상징한다. 세 개의 개선문은 쭉 이어져 보이도록 일렬로 서 있다. 파리 한복판에서 세 개의 문을 겹쳐 보고 있노라면 노크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사실 파리에서 개선문을 볼 때는 '아, 유명한 거 하나 봤다.' 정도의 감상에서 끝났다. 그 개선문에 담긴 여러 의미가 떠오른 건 라오스의 개선문 위에 올랐을 때였다.
라오스, 그러니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그 나라 말이다.
파리에 다녀온 후 비엔티안의 개선문 빠뚜사이에 올라갔을 때 기묘한 느낌이 나를 싹 감쌌다.
둘은 외관 디테일은 다르지만 희한하게 비슷한 느낌이 든다. 공원과 도로배치 같은 주변 경관을 보고 있노라면 이게 개선문을 모방한 건물이라는 점이 티가 난다.
프랑스에서 독립한 기념으로 프랑스의 랜드마크를 모방한다. 이해가 될 것 같기도 안 될 것 같기도 하다.
하긴, 서대문의 독립문 또한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다.
어느 민족이라도 해방, 독립의 기쁨은 승리의 문을 열면서 느끼고 싶은 모양이다. 개선문은 그 모든 자유의 원형이다.
문이 탈출이란 말이 이해가 안 된다면 비행기의 문을 생각해보자.
14시간 정도 비행기에 갇혀 있다 후다닥 문을 통과해서 빠져나갈 때의 기쁨과 환호. 또 다른 세상 정복을 시작하는 순간의 기대감, 여행을 마치고 정복 완료 후 고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 느끼는 뿌듯함과 동시에 밀려오는 노곤함.
이런 개인의 서사가 전쟁의 서사로 발전했을 때 세계 각국에는 개선문이 세워졌다.
과거는 흐려진다. 문을 만들어 기념했던 영광의 순간들은 사라졌다.
유적지에 가면 벽은 허물어지고 간신히 기둥 몇 개와 입구만 남아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그곳에 문은 사라지고 없다.
폼페이에서 무너진 기둥 사이로 있었을 문을 상상하고, 그 뒤에서 향락을 즐겼을 오만한 귀족들의 삶을 떠올려봤다. 아테네 한복판에서 옛 황제들의 영광이었으나 지금은 방치된 문도 봤다.
폐허 속에서 문이 사라졌을지라도 허망함을 느낄 필요는 없다.
태국 유적지의 무너진 건물 사이에 남은 문 뒤로 비치는 하늘이 충분히 예뻤다. 고대인들이 만든 문 뒤로 지금도 여전히 재미있고 아름다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 증거로 내가 그 유적지 사이를 뛰어다니며 위풍당당하게 여행했다. 그 문들은 여행자인 나의 개선문이 되었다.
문은 예술에서도 의미심장한 역할을 한다.
피렌체에서는 사람들이 기베르티가 만든 청동문 하나를 보겠다고 길게 줄을 선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문 위에 올라간 작은 장식이다. 그 사람이 무얼 생각하는 사람인지는 너무 철학적이라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생각을 하필 문 위에 앉아서 하고 있단 사실이 재밌다. 지옥의 입구이자 종말 위에 앉아 생각하다니 그게 무슨 생각이어도 그는 좀 멋진 사람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문을 보며 철학적 사고를 했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더 원초적인 이유 때문에 기억하는 문이 많다.
예뻐서 생각난다.
프리힐리아나의 하얀 골목길에서는 곱게 칠한 문들이 화사했다.
산토리니의 숙소에서는 문을 열었을 때 보이는 풍경이 고즈넉했다.
후에의 호스텔 로비에서는 열린 문으로 보이는 이국의 풍경이 재미있었다.
필라데리아에서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문들이 귀여웠다.
'이 댁 문이 참 예뻐요. 두드려보고 싶네요.'
그런 마음이 들게 하는 문들이 참 많다.
문을 열고 본 풍경이 예쁘면 '아, 이 문을 열어봐서 다행이다.', '아, 이 문들을 마주한 이번 여행을 해서 벅차다.' 그렇게 한마디를 하고, 그런 마음이 들면 여행이 또 한 번 좋아진다.
그래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은 뻥 뚫린 문이다. 유리나 나무, 철로 막힌 문이 아니라 야외에 있는 문들이 좋다.
문은 아니지만 문처럼 보여서 내 앞의 세상과 나를 연결해주는 문들. 어머니의 품을 열고 태어난 이후 수없이 연 세상의 문.
그게 참 좋다.
똑똑 두드리면 어김없이 세상을 보여주는 문.
문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