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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십리터 Sep 04. 2020

아, 커피 마시고 싶다

여행에서 마시는 커피의 특별함

아침이다.

눈을 뜬다.

눈을 뜬 거지 잠이 깬 건 아니다.

그러니까 이건 아직 꿈이다.

무의식이 내 머리채를 잡고 식탁 앞까지 끌고 간다.

꿈속에서도 잘 보이는 새빨간 기계가 있다.

기계를 열고 캡슐 하나를 넣는다.

이탈리아에서 온 커피 브랜드의 캡슐이다.

진한 향과 함께 쪼르르 커피가 나온다.

미래에는 영양 캡슐 하나가 식사를 대신한다 했던가.

확실히 내 아침밥은 캡슐에서 추출한 커피가 대체하게 됐다.

커피로 꿈에서 깰 때 꿈같은 생각을 한다.

'행 가고 싶다.'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커피를 마시고 싶은 게 아니다. 이탈리아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

내 여행은 한 잔 커피던가.

내가 마시고 싶은 건 카페인이 아니라 여행이다.

커피, 여행.  둘 다 내게는 특별한 존재.

커피.

참 오묘한 음료다. 음료라기보다는 그냥 커피라고 구분해야 자연스럽다. 커피는 그냥 커피다.

술도 아니고 마약도 아닌 주제에 애들은 먹으면 안 된다. 어릴 때 못 먹게 한 탓인지 어른이 되면 좀비처럼 커피를 찾아다닌다.

기호식품이라면 으레 단맛으로 미각을 자극해야 맞거늘 커피는 쓰다. 하지만 이상하게 다들 그 쓰디쓴 자극을 참고 한잔 두잔 석잔을 마신다. 그러다 말한다.

"아, 이거 맛있네."

나도 그랬다. 정신 차리고 보니 커피가 좋았다. 불현듯 좋아진 탓에 언제부터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엔 좋아서 먹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필요해서 먹었다. 밤새며 일할 땐 하루에 열 잔 가까이도 마셨다. 손을 덜덜 떨어가면서도 마셨다. 카페인이 이정도 중독성이라면 코카인은 절대 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며 들이부었다.

이제는 커피를 안 마시면 두통이 와서 습관적으로 먹는다. 그래서인지 일상에서 마시는 커피는 즐거움보다 고통과 연결될 때가 많다.

고작해야 일상일 뿐인 커피가 특별하고 행복한 존재가 되는 순간이 있다.

여행할 때다.

커피 The Love...

처음 에스프레소를 먹은 건 주문을 잘못해서였다.

사약이었다.

처음 에스프레소를 제대로 먹은 건 이탈리아에서였다.

신세계였다.

이탈리아는 커피가 유명하기 때문에 로마에서는 현지인처럼 에스프레소를 마셔야 한다고 했다.

남들 다 마신다기에 나도 마셔봤다.

아직 아메리카노에 얼음 반 시럽 반을 넣어 먹던 때였다. 에스프레소는 소주잔에 담긴 사약이란 기억밖에 없었다.

소주잔 같은 작은 잔에 설탕을 때려 부으면서도 의심의 눈길을 흘렸다.

타짜도르의 에스프레소. 이탈리아에서는 흔한 맛이지만 저 쬐그만 잔이 내 커피 인생을 바꿨다.

커피는 쓰다. 에스프레소는 제일 쓰다. 고로 이건 쓸 것이다.

완벽한 삼단논법을 들먹이며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으로 마신 타짜도르의 커피. 한입에 털어 넣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의자가 아닌 바(Bar)에서 일어선 채로 작은 잔에 설탕 한 봉지를 쏟아 적당히 저어 한입에 꿀꺽. 처음 마셔보는 방식의 커피.

'야, 이거 왜 맛있냐?'

그때부터였을까요. 유럽에 가면 에스프레소를 먹기 시작한 게.

로마 골목에 있는 타짜도르는 커피 냄새를 따라가면 나온다. 건물이 안 보일 때 부터 커피 냄새가 진동한다.

이탈리아에서 마신 커피는 전부 맛있었다. 허름한 호텔에서 조식으로 주는 라떼부터 화장실을 쓰려고 급하게 마신 에스프레소는 물론이고, 버스를 기다리다 시간을 때우려고 마신 카푸치노는 맛있어서 어이없었다.

커피란 원래 이런 맛이던가.

후르츠칵테일 속 체리가 체리인 줄 알다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진짜 과일 체리를 먹었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었다.

집집마다 모카포트를 상비하고 커피를 인권으로 여기며 스타벅스의 설 자리를 잃게 만든 나라다웠다.

전 세계 커피 맛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여행의 즐거움 포인트가 하나 더 생겼다.

여행 속에서 만나는 커피가 좋아졌다.

늘 먹는 커피 주제에 남의 나라에서 먹으면 왜 그렇게 특별하단 말인가.

여행 중엔 잠을 깰 필요도 없는데 커피를 마시기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도 찾는다.

때론 커피가 여행의 목적이 되기도 한다.

티볼리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잠깐 비는 시간에 호다닥 먹은 카푸치노. 아무 생각없이 시킨 커피가 내 인생에서 맛본 최고의 카푸치노가 될 줄이야...

유럽의 카페투어는 큰 즐거움이다. 사연 있는 오래된 카페를 찾아가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귀족과 상류층의 사교의 장이었던 수백년 전 카페들이 아직 남아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인 베네치아의 플로렌스에는 카사노바부터 괴테, 바이런 등등 저명한 인사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포르투갈 포르투에는 해리포터의 탄생지라는 유서 깊은 마제스틱 카페가 있다.

시차 때문에 몽롱한 몸을 이끌고 간 카페 플로리안에서는 카사노바가 먹었다는 일명 카사노바 민트 핫초코도 판다

오래된 만큼 커피에 역사를 담아 판다. 가격도 특별해서 문제지만 에스프레소 한잔으로 유명인들의 거룩한 사연을 마신다고 생각하면 빼놓을 수 없는 여행의 재미다.

사교의 장이었던 유럽 카페에서 마시는 한 모금의 커피가 책 한 권과 같다.

조앤롤링이 해리포터를 집필했다는 전설이 있는 마제스틱 카페에서 친구들에게 보낼 엽서를 쓰면서 마신 봉봉커피

유럽의 커피가 역사라면 동남아의 커피는 날씨다.

쪄 죽어도 뜨겁고 크레마가 진한 에스프레소를 마셔야 하는 유럽과 달리 동남아에서는 얼음 가득한 달달한 커피가 제격이다.

동남아에서 먹는 차가운 커피의 아찔한 맛은 여행지의 날씨에서 나오는 맛이다.

베트남 여행이 유행하면서 베트남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 콩카페가 한국에도 들어왔다.

한국 콩카페 앞을 지나가 본 적은 있지만 먹지는 않았다.

베트남 여행 중에 자주 갔던 콩 카페. 더운 날씨 속에서 마시는 코코넛스무디 최고!

콩카페의 코코넛스무디커피가 맛있는 이유는 날씨 때문이다. 더위와 습도에 지쳐 비틀거리다 맛보는 달달한 커피는 땀에 젖은 기분을 말랑말랑하게 녹여준다.

콩카페가 아니어도 베트남의 카페 쓰어다는 특별하다.

특이한 필터에 커피를 내리고 연유를 때려 부어 마시는데 거칠 정도로 쓴 커피에 극도로 단 연유가 섞인 맛이 상당히 중독성 있다.

콩카페도 좋지만 베트남 커피의 묘미는 필터 그대로 주는 커피와 잔 아래에 깔린 연유, 덩어리 얼음이 합쳐진 강렬한 맛이다

동남아에서라 항상 차가운 커피만 마시는 건 아니다.

베트남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추운 사파에 도착한 새벽에 패딩 입은 현지인들을 보며 마신 커피는 따듯했다.

야간기차를 타고 도착한 사파역 앞. 버스를 기다릴 때 주전자를 들고 와서 믹스커피를 파는 장사꾼의 유혹에 넘어가서 마신 믹스커피.

방콕 호텔 조식 뷔페에서는 따듯한 커피를 마시며 에어컨 빵빵한 호텔을 벗어나지 않을 궁리를 했다.

미얀마 버스터미널에서 버스회사 직원이 준 커피는 복닥거리는 양곤의 분위기와 미묘한 열기가 담겨서 맛있었다.

야간버스를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서비스로 주는 커피와 빵 한쪽을 먹으며 다음 여행을 떠올리던 한적한 미얀마의 밤

그곳이 어디더라도 여행 중에 커피를 마시면 그 도시의 일상에 녹아드는 기분이 된다.

도시의 원주민들은 잠을 깨고 일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마시는 커피를 여행자인 내가 동냥한다.

뉴욕에서 마신 커피는 매우 비쌌지만 뉴요커가 된 기분을 느끼기 위해선 아메리카노가 필수였다.

굳이 바쁜 출근 시간에 뉴요커들 사이에 끼어서 먹은 베이글과 아메리카노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뉴욕의 맛

호주에서 브런치와 함께  플랫화이트(Flat White)를 마시면 호주 사람들의 모임에 초대받은 기분이 들었다.

시드니 빌즈와 멜버른 하이어그라운드에서 브런치와 함께 마신 플랫화이트(호주식 라떼)

극야현상 때문에 낮에도 깜깜한 노르웨이에서 마신 커피는 생체리듬을 조절하기 위한 호르몬제 역할이었다.

노르웨이 어느 식당에서 디저트로 주문한 에스프레소.  이케아 트레이에 올려진 북유럽 갬성 커피.

여행 중에 커피를 마신다는 건 내가 보는 풍경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래서 여행 중에 마시는 커피는 맛이 없어도 맛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과 비슷하다.

여행의 풍경을 눈을 통해 머릿속에 집어넣는 과정이다. 멍하니 바라보는 것보단 커피 한잔 때려 넣을 때 더 오래 보게 되고 찬찬히 되새기게 된다.

좋은 카메라로 찍으면 풍경이 더 선명하고 잘 나오겠지만 어디 추억이란 녀석이 카메라 성능에 따라 변하겠는가.

좀 싸구려 커피를 마셔도 마시는 순간의 경험과 배경이 특별하면 맛집이다.

이탈리아 기차 1등석에서 준 커피와 간식, 스페인 버스터미널에서 대충 아침으로 먹은 커피와 뻑뻑한 빵. 맛없어도 다시 먹고 싶은 커피들.

커피가 특별한 이유는 뭘까?

커피는 시간을 담는 음료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여행 중에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에서 잠깐 나는 짬에, 혹은 길게 붕 떠버린 시간을 때우기 위해 제일 만만한 행동은 카페에 들어가 커피를 주문하는 일이다.

바쁜 순간과 여유로운 시간을 동시에 느끼는 음료라니. 이 얼마나 특별한가.

커피가 식거나 녹는 동안 사라지는 거품과 줄어드는 얼음을 바라보며 쓰는 일기를 좋아한다.

여행이 가장 잘 기억나는 순간이다.

커피 한잔에 여행을 꾹꾹 눌러 담아 삼킨다.

별달리 할일이 없었던 샌디에고에서 유일하게 기억나는 일은 노상에서 파는 커피 한 잔을 들고 거대한 공원을 기웃거린 일

비행기를 타면 맥주나 와인을 마시고 선잠에 빠진다. 비행기에서 잘 자지 못하는 탓에 내릴 때가 되면 정신이 몽롱하다.

마지막 기내식이 나오면 트레이에서 플라스틱 컵을 들어 커피를 달라고 말한다. 경건하게 커피를 받아 마신다.

비행기에서 주는 커피는 참 맛이 없지만 각성 효과만큼은 최고다.

마시는 순간 여행자로 거듭난다. 이제 여행이 시작되는구나 싶다.

어느 항공사에서 받아 마셔도 똑같이 맛없는 맛이 나는 커피를 시작으로 여행지와 어울리는 커피를 찾아다닌다.

매일 마시는 커피 속에서 여행이 보이는 이유다.

지금 나에게 바람이 있다면 아침에 부은 눈을 벌리기 위한 캡슐커피가 아니라 여행지의 바람이 살짝 스친 커피 한잔이다.

필라델피아 자유의 종 근처에 있는 라콜롬브 카페에서 마신 커피 한 잔. 자유롭게 여행과 커피를 즐길 날이 빨리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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