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직업, 문화기획자
퇴직금 탈탈 털어 차린 이 카페를 포기하려던 찰나, 나는 발버둥이라도 쳐보기로 결정했다. 한두 분의 단골손님과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그렇게 읽어온 책들이 쌓이기 시작하니, 책 속 문장들도 빼곡하게 수집되었다. 수집한 좋은 문장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잊는 게 속상해 필사모임도 시작했다. 필사할 문장들을 골라내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책 속 문장을 단순히 필사하는 데에는 5분도 걸리지 않았다. 필사문장 멤버들에게 공급할 문장들을 더 뽑아내기 위해 책을 더더더 급하게 읽어댔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고 보니 하나를 깨닫게 됐다. 지금까지 허겁지겁 탐욕스럽게 읽어댄 책들과 그 책들 속 문장들이 다 고만고만하다는 것. 책은 읽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수많은 메시지를 주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책을 읽는 내가 고여있으니 무수히 많은 책을 읽어도 받아들이는 것은 늘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그 나물에 그 밥으로 만들어진 비빔밥은 늘 싱겁기 마련이다.
나는 책 편독을 줄이기 위해 과학, 사회, 역사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다양성의 힘이 발휘되었다. 각자가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읽기 위해 보틀북스를 찾기 시작한 거다. 유발 하라리의 전집을 읽는 모임, 칼 세이건의 과학책 읽기 모임, 사유하는 철학책 모임, 박경리 선생님 토지 완독모임, 한국 역사를 담은 소설책 읽기 모임, 에세이 읽기 모임 등 독서모임이 세분화됐다. 독서모임 멤버도 4명에서 이제는 200여 명에 달한다. 하루 매출 0원이 줄줄이 비엔나소시지처럼 이어지는 나날이었건만, 그들이 마셔주는 커피 한잔의 위력은 엄청났다. 그렇게 나는 4년간 독서모임을 무료로 운영했다.
그리고 어느 날, 독서모임 멤버들이 이런 말을 하기에 이른다. "이제 그만 무료로 하고 돈 좀 받아서, 살림에 보태 써주세요. 이 공간을 유지시켜 주는 게 사장님의 역할이에요." 스스로 돈을 내겠다는 손님들. 도서 정가제를 실시한다고 책의 정가를 그대로 다 받는대도 책을 주문하는 손님들. 인터넷이나 대형서점에서 10% 할인과 5% 마일리지 적립이라는 그 혜택을 스스로 내려놓는 사람들. 합리적인 소비자라면 걸어야 하는 길을 '이것이 합리적이다'라는 이유로 포기하는 사람들.
그들의 포기한 그 합리적인 혜택들을 나는 어떻게든 돌려주고 싶었다. 그들의 비합리적인 소비가 감사하면서 미안했다. 그들과 보낸 시간의 축적이 만들어낸 애정에 보답하고 싶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는 나날이 이어지다가, 우연히 전 직장의 경력을 살릴 기회가 왔다. 바로 각 지자체, 정부의 문화예술 공모사업에 참여하는 것. 기획서를 쓰고, PPT 발표를 하고, 예산을 편성하고 정산하고. 이 모든 과정은 이미 직장인시절 진력이 날 정도로 해왔던 것들이다. 그렇게 나는 공모사업에 뛰어들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닌, 회사를 위한 것이 아닌, 오롯이 손님들의 그 마음을 위해서 지난날 포기했던 것들을 다시 선택했다. 단돈 10만 원이라도 예산을 따와서 그들에게 무료로 책 한 권씩 나눠주기도 했고, 넉넉한 예산을 받으면 지역의 공예가를 초청해 원데이 클래스를 열기도 했다. 이 작은 8평짜리 공간에서 도자기도 만들고, 보자기 공예, 비누 만들기, 백드롭 페인팅, 튤립심기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손님이 좋아하는 작가를 초청해 북토크쇼를 개최하기도 하고, 방문하는 손님들의 가족을 위해 키즈 북클럽, 키즈 공예클래스 등을 열기도 했다.
보틀북스에서의 보낸 시간이 직장인 시절의 경력을 따라잡은 시점이 왔다. 이제 보틀북스가 나의 주경력이 되는구나, 새삼 가슴이 먹먹해진다. 내가 한 번 포기하려 마음먹었던 일이 주경력이 돼버렸던 이유, 그건 바로 손님들의 애정이었다. 그들의 애정이 이 공간을 만들었고, 그들의 마음이 한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내게 '문화기획자'로서의 새로운 길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들로 인해 다채로워졌다. 나의 색을 채워나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