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직업, 첫 번째 사연
'인간'으로 사는 일도 하나의 직업이다. 이 무거운 육체를 매일같이 이끌며 하루를 살아내는 일은 어떤 직업의 강도와도 비교되지 않는다. 육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관리해야 한다.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직업을 가진 이들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기 어렵다. 그 누구나 누군가의 돌봄을 받고 성장하며, 돌봄을 주는 순간을 겪고, 이내 또 돌봄을 받는 존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직업군의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법마저 배워야 한다.
그런데 요즘 나는 이 직업에 의문이 하나 생겼다. '나는 어디까지 더불어 살아야 하는 걸까?' 나 하나 잘살기도 버거운데, 다른 이들을 챙길 여력은 있을까? 나도 나 하나를 지탱하기 어려운데, 주변의 많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사회나 국가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결국 나는 나만 잘 챙기면 되지 않나. 험난한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내 것'을 잘 챙겨야 함을, 착한 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나만의 안위를 잘 챙겨야 함을 사회는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다 <국선 변호인이 만난 사람들>이라는 책을 쓴 몬스테라 작가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늘 처절했으며 바닥에 있었다. 우리가 외면하고 사는 사회의 한 단면, 그 부분을 매일같이 마주하고 있는 이이기에, 사회의 최전방에 서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품고 있던 질문을 던졌다. '나는 어떤 사람들을 어디까지 도와야 하는가?' 몬스테라 작가님의 답변은 간단했다. "본인의 자리에서만 최선을 다하면 돼요"
본인의 자리에서만 최선을 다한다는 말, 그 간단한 말이 사실은 굉장히 뿌리가 얼기설기 얽혀있는 깊은 메시지가 있다. 가족은 모빌과 같다. 외풍에 흔들리기도 하지만 굳건히 서로의 무게추를 지키고 있는 모빌. 그렇지만 단 한 명이 흔들리면 다 같이 무게 중심을 잃고 흔들리고야 마는 모빌. 그렇기에 나는 나의 중심을 잘 지키고 있어야 한다. 그게 가족을 지키는 일이고 궁극적으로 나를 지킬 수 있는 일이기에. 나를 바로 세우고 가족에게 사랑을 나눠주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하지만 그 사랑을 나눠 받은 나의 부모님, 남동생, 남편과 아들은 그들 각자가 가진 모빌에 사랑을 또 전파할 테다. 그 영향력의 힘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막대하기까지 하다.
<국선 변호인이 만난 사람들>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가 사회의 안전망을 짜는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가 빈곤한 사람, 취약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 쓰는 것은 언젠가 나와 내 가족이 이용할 수고 있는 그물을 함께 짜는 일이다. 그럴 때 우리는 낯선 서로의 보호자가 되어줄 수 있다. (...) 우리는 순간순간을 산다. 어렵고 힘든 시간 속에서도 한순간의 기쁨으로 다시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 나의 순간의 도움이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되어 삶을 이룬다는 것을, 그리하여 한 생이 바뀌어 갈 수 있음을 믿는다. 이것이 내가 여전히 국선 변호인인 이유다"
어쩌면 나는 철저히 이기적일지도 모른다. 궁극적으로 나와 내 가족의 안위를 위해, 나는 타인을 돕기로 했다.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주변을 철저하게 사랑하기로 했다. 그럼으로써 사회 안전망이라는 그물을 직조하는데 한 실가닥을 해보기로 결심했다. 인간이라는 직업을 잘 해내보자고, 잘 살아내 보자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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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자 또한 하나의 모빌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 남겨진 가족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고 해요. 특히 자녀들에게 범죄사실을 알리기가 참 어렵겠죠. 부모가 구금되었는지도 모르는 채 남겨진 자녀들. 수용자의 자녀와 가족들을 돕는 재단 '세움'이 있습니다. 작지만 그 순간이 누가에게는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후원을 결심했습니다. 결국은 나를 위해 나를 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