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직업, 카페 사장의 사연
카페 문을 여는 동시에 “징하게 찐한 커피 한 잔 주소”라는 대사를 내뱉는 60대 손님이 한 분 계신다. 우리 카페는 기본으로 에스프레소 투 샷(2잔)이 나가는데, 이 손님에게는 그 두 배 혹은 세배로 드린다. ‘이럴 거면 에스프레소를 드시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에스프레소라는 메뉴를 설명해 드리고 권해보았지만 고개를 저을 뿐이다. 작은 샷 잔 하나 받아 드는 일, 양이 풍족해 보이지 않은 커피는 그의 입맛을 돋우지 못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받아 들면 이제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족력이 강한 암을 앓았지만, 자신만은 투병생활을 기어코 끝내어 생을 이어 붙이게 되었다는 이야기. 병으로 인해 부모를 잃은 조카들을 위해 아버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는 그의 각오. 벌써 스무 번은 넘게 들은 이야기지만, 나는 앞으로 스무 번을 더 들을 수도 있다.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끊임없이 말하는 이유는 그 힘든 시기를 이겨낸 자신이 너무나도 대견해서이지 않은가. 그 고단한 시간들을 견뎌낸 자신이 그 누구보다 놀라워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반복되는 이야기는 맥주로 끝이 난다. 속이 아리도록 시린 맥주 한 잔을 들이키며 묵은 갈증을 달래 본다. 에스프레소 6잔이 들어간 쓰디쓴 커피부터 맥주까지, 그 무엇 하나 그의 건강에 이롭지 않다. 하지만 인생보다 쓰지 않은 그것들은 그에게 감미로웠을 테다.
그로부터 얼마뒤, 그는 또 카페로 찾아왔다. 부득이하게 강풍이 불어서 출입문 두 쪽 중 한쪽을 잠갔는데, 내가 그 문을 열기도 전에 반대편 출입문을 향해 발걸음을 부리나케 옮긴다. 반대편 출입문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가 들어오길 들어오지만, 10분이 지나도, 20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생겼나 서둘러 뛰어나가보는데, 손님은 그 사이 동행을 만들어왔다. 바로 우리 마을 할머니였다. 카페가 있는 동네 특성상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참 많지만 나는 유독 그 할머니에게 마음이 간다. 대화를 나눠본 적도, 자주 마주친 적도 없지만 그녀가 좋았다. 실어증으로 인해 ‘으’ ‘끄’하는 짧은소리를 낼 뿐이지만, 언어로는 포장할 수 없는 그녀의 진심을 느낄 수 있다. 내가 놀랄까 봐 똑똑 창문을 두들기고 들어오는 배려, 커피를 건네받으며 스치는 손길, ‘으으‘하는 소리가 ’잘 계세요 ‘라는 인사말로 드리는 그녀의 표정. 그녀를 통해서 언어가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성격과 마음이 묻어있는 ‘끄으‘ 하는 소리가 나는 더 이상 ’소리‘로만 드리지 않았다. 우리는 충분히 말을 나누었다.
그런 그녀의 등장에 “어쩐 일로 두 분이 함께 오세요?”라고 물어본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만 시선을 고정한다. ”그, 그. 니 뭐 물래?” 투박하게 묻는 그의 질문에 그녀는 ’으으‘ 하는 소리를 낸다. 찰떡같이 알아들은 나는 ”커피 두 잔 내갈게요. 한 잔은 찐하게, 한 잔은 연하게“ 두 분은 고개를 끄덕인다. 할아버지의 에스코트에 할머니는 쭈뼛쭈뼛 의자에 앉는다. 커피가 나올 때까지 둘은 아무 말이 없다가, 이내 파들 거리는 목소리로 할아버지가 먼저 운을 뗀다. ”니, 잘 살았나. 언, 언제부터 말은 못 했노? 아들은 있나? “ 몰아치는 할아버지의 말에 할머니가 ‘으으’ 소리를 내보지만 할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뭐라고? “ 만 반복할 뿐이다. 이내 할아버지는 도저히 마음을 붙잡지 못해서 한 마디 툭 던진다. ”내, 니 많이 사랑했다 “ 나는 카운터 뒤에 숨어서 귀동냥을 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 세상에, 세상에!‘ 그 직선으로 내리꽂는 고백에 할머니는, 어깨를 안으로 말며 몸을 베베 꼬았다. 니가 마을에서 제일 착했다며, 너보다 예쁜 애는 없었다며, 그래서 많이 사랑했다며, 너는 몰랐겠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랬노라며 뒤늦은 사랑을 고백한다. 그렇게 짤막한 대화 후 할머니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그녀를 보내고, 오랜 시간을 혼자 의자에 앉아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잔에 한가득 따라있는 맥주만이 탄산을 톡톡 쏘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어떤 추억 속을 둘러보고 있을까. 어느 시간선에 머물러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