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사이사이 100년의 시간이 흐른다
마음먹고 나섰지만 아직 차갑기만 한 바깥공기에 좁다란 길을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일제 강점기 대구 읍성이 허물어진 자리 위에 쭉 뻗은 대로와 그 너머 구불구불한 삶의 발자취들. 한참을 기웃하다 어느 담벼락 앞에 멈추었다. 담벼락의 시 한 수. 그 담에 몸을 기대 가만히 따라 읽는다.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곧 찾아올 봄인데 이상하리만치 그리워지고 만다.
제주 감귤, 성주 참외, 무등산 수박, 나주 배, 지명과 함께 바로 연상이 되는 특산물이 있다. 대구는 단연 사과. 우리 토종 사과에 관한 기록은 고려 문헌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처음 등장하는데 오늘날 우리가 즐겨먹는, 특히 사과 명산지로 알려진 대구 능금의 역사는 그로부터 수 세기 후로 껑충 뛴다. 1899년 대구 약전골목에 한옥 한 채를 얻어 미국약방을 열고 진료소 개원을 준비하던 미국 북장로교 소속의 의료선교사 존슨(Woodbridge O. Johnson)은 또 다른 선교사 아담스(James E. Adams)와 함께 달성 서씨 문중 소유의 작은 산을 매입했다. 동산이다. 이후 존슨은 동산에 벽돌집을 지어 미국약방 자리에 문을 열었던 영남지역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대구) 제중원을 옮기고 근처에 마련한 사택 정원에는 미국에서 들여온 사과나무 72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잘 사는 것 이전에 밥 벌어먹고 사는 것이 급했던 시절이었다. 다행히 대구는 사과 재배에 최상의 기후 조건이었고 이곳에서 맛있게 익어간 열매는 대구를 뽀얀 사과나무 꽃바람 이는 능금의 고장으로 일구었다고 한다.
바로 그 동산에 올랐다. 올망졸망 빨간 열매 달린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알알의 크기가 자두보다는 작고 앵두보다는 크다. 설마 사과나무일까 싶은데 표지석이 사과나무가 맞다 한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사과나무이다. 존슨 선교사가 심은 사과나무 열매의 씨앗이 다시 뿌리를 내린 아들목으로 지난 2000년 대구시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사과나무 언저리 청라언덕으로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대구 중구청에서 운영하는 골목투어 가운데 근대문화골목을 둘러볼 수 있는 제2코스가 이곳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청라언덕은 푸를 청菁, 담쟁이덩굴 라蘿, 푸른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동산의 언덕배기를 가리킨다. 여름철 대구 지역의 무더위는 외국인 선교사들에게도 예외가 없었다. 그들은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주택에 푸른 담쟁이덩굴을 휘감아 언덕 위로 내리쬐는 볕을 식혔다. 나무도 집도 덩굴도 100여 년 전의 빛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청라언덕은 대구 근대문화가 움튼 상징적인 장소이다.
청라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세 채의 선교사 사택 가운데 선교박물관으로 운영하고 있는 스윗즈 주택이 특히 인상적이다.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양옥 지붕에 기와를 이었다. 사람으로 치면 양복 차림에 중절모 대신 갓을 쓴 격이다.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의 생활문화와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자연스레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고자 했다. 더욱이 일제의 지배가 시작되던 그 무렵 대구읍성이 마구잡이로 철거되었는데 성돌의 가치를 눈여겨본 선교사들이 성돌을 청라언덕으로 옮겨 주택의 주춧돌로 사용해 기반을 다졌다. 때문에 이곳의 선교사 주택은 근대건축물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각각 교육역사박물관과 의료박물관으로 단장한 블레어 주택과 챔니스 주택 사이의 뜰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입 맞춰 노래를 부른다. 골목투어 참가자들이다. 익숙한 가락에 귀가 저절로 쫓아간다. 노랫말을 잘 기억하진 못해도 음을 따라 흥얼흥얼 하게 되는 가곡 <동무생각>이다. 이 노래의 배경이 첫 소절에 등장하는 청라언덕이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청라언덕 아래 계성학교를 다니던 박태준이 이웃한 신명학교 여학생을 좋아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의 동료 이은상이 쓴 시에 박태준이 다시 곡을 붙였다고 한다. 수줍은 성격의 박태준은 끝내 사랑을 고백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의 세레나데는 봄바람에 실려 숱한 마음을 설레게 한다.
청라언덕이 마냥 낭만적이기만 한 곳은 아니다. 언덕배기에서 계산성당 방향으로 난 90계단까지는 1919년 3월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퍼져 나갔던 3.1 운동길이다. 대구에서는 3월 8일에 거사가 일어났는데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학생들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당시 솔밭이 무성하던 동산 비탈의 오솔길을 헤쳐 만세운동 현장으로 나갔다. 며칠 밤낮을 새워 몰래 숨어 만든 태극기를 가슴팍 깊숙이 품고 숨죽여 이 길을 오갔을 소년 소녀들. 3월이라 그런지 더욱 아릿한 기분이 들어 자락 나부끼는 태극기를 향해 잠시 고개를 숙인다.
90계단을 밟고 언덕길을 내려오면 큰길 건너에 계산성당이 있다. 서울과 평양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이고 영남지역에서는 최초의 서양식 성당으로 고딕 양식이 이렇다 저렇다 부연설명이 많지만 전문적인 식견 없이 봐도 참 근사한 건축물임이 느껴진다. 건물 양쪽으로 높이 솟은 뾰족 첨탑을 올려다본다. 하늘을 찌르고 있는 이 같은 첨탑과 성당 내부의 높은 천장, 둥근 아치, 크고 긴 창문에 오색 찬란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모두 고딕 양식을 상징한다. 하늘에 조금 더 가까이 닿고자 하는 신앙심 또는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이 만들어낸 중세의 대표적인 예술 양식이다. 1902년 계산성당이 만들어진 그때나 100년이 지난 지금이나 누가 봐도 언제 봐도 웅장하고 고풍스럽다. 스테인드글라스 일부에는 천주교 박해 당시 순교한 한국 성인들로 장식한 것도 계산성당에 특별함을 더한다.
계산성당 뒤로 이어지는 골목은 또 다르다. 뒷골목이라지만 유명 백화점을 비롯한 고층 빌딩이 솟아오른 도심 가까운 곳인데 장난기 가득한 골목대장 아이가 툭 튀어나올 것만 같은 정취가 느껴진다. 샛길도 어찌나 많은지 골목이 새로운 골목을 가지 친다. 그 샛길 어느 담벼락에 사람이 밀린다. 다들 잘 걷다가 유독 그 담벼락에 다다르면 일단정지. 뭔가 싶어 고개를 빼 보게 된 것은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의 시 구절이다. 이상화 고택 앞에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했던 서상돈 선생의 집이 복원되어 있다.
그 길 따라 이어지는 진골목은 해방 전까지 오랜 세월 대구 지역의 토착세력이었던 달성서씨 집성촌이었고 해방 이후에는 내로라하던 부자, 유지들이 모여 살던 부촌이었다. 진골목은 긴 골목이라는 뜻이다. 길다를 질다로 발음하는 경상도 말투가 지명에 남았다. 꽤 많은 세월이 흘러 대저택에 이런저런 상점과 식당이 들어서고 주인도 바뀌었지만 골목길은 옛 모습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다. 놀랍도록 정겨운 풍경인데 아마도 빼앗긴 땅을 온전히 제 힘으로 되찾으려 했던 땀방울들이 이곳 골목 깊숙이 배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인근 약전골목에서 밀려오는 한약재 냄새도 한몫을 한다.
몇 해 전 진골목을 걷다 들어간 다방이 생각났다. 커피와 계란 노른자 들어간 쌍화차, 약차를 팔고 주전부리로 생과자 한 접시를 푸짐하게 내주던 다방이었다. 기억을 끄집어내 찾아갔는데 셔터가 내려져 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으로 이전을 했다. 다방 문을 열었다. 미도다방이다. 하루에도 수 백 명의 단골 어르신들이 출근하는 진골목 최고의 쉼터이다. 자리는 옮겼지만 금붕어 쏘다니는 수족관과 두툼한 색동 방석 등 옛 다방의 느낌이 살아있다.
진골목은 옛날만큼 진(긴) 골목은 아니다. 기념사진 몇 장 찍고 말라면 그럴 수도 있을 만큼. 그러나 많은 이들의 세월이 농축된 그 길에 얽힌 이야기는 긴긴 꼬리를 문다. 단골이든 아니든 한복 곱게 차려입은 마담이 심심한 말벗이 되어주는 진짜 다방에서 앉아 잠시 쉬어간다. 주거니 받거니 진골목에 서로의 이야기를 더한다. 진골목이 여전히 유효한 까닭은 아마도 이 수많은 이야기들이 자아낸 진한 향수 때문이 아닐까.
위 글은 2014년 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농민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생활정보지 <전원생활>에 기고했던 '근대를 거닐다' 연재 가운데 2014년 3월호 '대구 청라언덕, 진골목'편의 원문임. (글 : 서진영 / 사진 : 임승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