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물길 타고 흘러든 근대에 머물다
한 때는 조선 팔도에서 가장 흥했던 장이 섰다는데 이제 이 지역 출신이 아니면 여기가 충청도인지 전라도인지 알쏭달쏭해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졌을 만큼 몸집이 작아진 소도읍. 그러나 여전히 닷새에 한 번 장이 서는 읍내, 바로 강경이다. 그곳에는 비록 낡고 바랜 표정이지만 근대기 강경의 영광이 그대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강경역전 사거리에 상점 간판 여럿이 눈에 들어온다. 사거리다방, 최신양복점 등 어딘가 모르게 시골 읍내 분위기가 물씬 나는 간판들이다. 마을 안쪽으로는 더 많다. 수예사, 표구사, 농약사, 이발소, 사진관까지. 여전히 손님 드나드는 곳도 있고 간판만이 남이 있는 곳도 있다. 이 간판들이 반가운 것을 보니 새삼 ‘세월 참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구나.’ 느끼게 되는데 마을 깊숙이 파고들수록 그보다 더 오랜 흔적을 마주하게 된다. 가깝게는 십수 년 전, 멀게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의 촬영장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오래된 풍경들이다.
본래 물길 따라 번성했던 땅이다. 서해 바다에서 잡은 해산물이 금강을 거슬러 내륙과 가까운 강경 포구를 거쳐 방방곡곡에 닿았고, 샛강을 타고 올라온 각지의 물자들 역시 이곳으로 몰려들어 장마당이 펼쳐졌다. 갓 잡아와 펄떡이는 해산물도, 비옥한 땅에서 난 곡물도, 포구를 오가는 사람들도 하나 같이 생기 넘쳤다. 현재 강경 인구가 1만 남짓인데 한창 번성했을 때엔 하루 유동인구만 10만에 달했단다.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 전의 모습이다.
이 조용하고 작은 읍내에 근대문화유산을 상징하는 등록문화재만 무려 여섯이란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제는 물자가 모여들던 강경에 눈독을 들였다. 일본인들이 강경에 들어오면서 경찰서, 법원 등 관공서와 은행, 교회, 병원, 극장, 학교 등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리를 잡았다. 젓갈시장 끝자락의 구 한일은행 강경지점이 대표적이다. 1905년 한호농공은행 강경지점으로 설립된 이후 조선식산은행 강경지점, 해방 후에는 한일은행 강경지점을 거쳐 충청은행 강경지점으로 사용되었다. 강경의 화려한 시절을 모두 겪고 지금은 강경역사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겉보기에 2층 이상의 다층이 아닐까 싶지만 실제로는 천장이 높다란 단층 건물이다. 붉은 벽돌로 그 높이를 네모반듯하게 쌓아 올렸으니 그 탄탄한 기운이 은행답다.
은행 건물 가까이에 구 강경노동조합 또한 근대기 기세 높았던 강경의 상권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1925년 한옥구조의 2층 건물로 지어졌는데 현재는 1층만이 남았다. 강경역사문화안내소로 단장해 강경지역의 근대문화유산을 둘러보려는 여행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사실 근대문화유산이 많다고 하지만 그 흔적을 찾아 여행하기에 강경은 그리 친절하지 않다. 골목골목 흩어져 있기도 하거니와 옥녀봉을 제외하고는 이정표를 찾아보기 힘들어 한참을 헤매게 된다. 친절히 길을 안내해주는 마을 어르신들도 많고, 설렁설렁 걷다 보면 얼추 만나게 되지만 알뜰하게 탐방하려면 구 강경노동조합에 들러 안내를 받는 것이 좋다. 덕분에 1920년대 강경시장의 전경을 찍은 사진에서 유일하게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구 강경연수당 한약방과 1930년대에 건축된 중앙초등학교 강당, 구 강경공립상고관사까지 두루 둘러볼 수가 있었다.
꼭 등록문화재나 근대문화유산이 아니더라도 흘러간 시간이 강경 곳곳에 박제되어 있다. 이젠 많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2층으로 올린 일본식 가옥들을 위시하여 낡은 슬레이트 지붕, 녹슨 철문, 비틀어진 나무 창틀, 벗겨진 외벽, 사람 온기 느껴지지 않는 빈집과 곧 허물어질 듯한 텅 빈 창고들이 드물지 않게 눈에 밟힌다.
부지런히 발품을 팔다 보면 이 작은 읍내에 교회 참 많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된다. 고층 건물이 드문 강경의 낮은 지붕선 위로 뾰족한 첨탑과 십자가가 불쑥불쑥 솟아있다. 강경은 개화기 서양 문물의 통로이기도 했다. 외국인 선교사들도 강경 포구로 들어왔다. 1896년 침례교회, 1901년 감리교회, 1919년 성결교회가 잇따라 강경에 발을 디뎠다. 그보다 앞선 1845년 한국인 최초로 중국 상하이에서 천주교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 역시 강경 포구를 통해 국내로 들어왔다. 강경으로 기독교 성지순례를 다녀가는 이들이 적지 않은 이유다.
옥녀봉에도 강경의 근대 기독교 유산이 남아있다. 금강이 내다보이는 한쪽에 초가지붕을 한 ㄱ자형 가옥은 한국 침례교의 첫 예배지이다. 본래 강경과 인천을 오가며 포목 장사를 하던 지병석의 집이다. 그가 미국 보스턴의 침례교단에서 파송한 파울링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1896년 2월 9일 일요일 이곳에서 첫 주일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이듬해 파울링 선교사가 그 앞쪽 평평한 터에 역시 ㄱ자형의 교회를 건축했는데 일제는 이 일대를 공원화하고 신사를 지었다. 그리고 신사 참배를 드리는데 방해가 된다며 교회를 폐쇄하고 부지마저 빼앗아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침례교 첫 예배지도 슬레이트로 지붕을 덧대는 등 초기와 달리 상당 부분 변형되었는데 2013년에 옛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초기 교회를 ㄱ자 한옥 구조로 건축한 것은 남녀가 유별했던 당시 한국 사회의 유교적 전통을 배려한 까닭이라고 한다.
옥녀봉에서 읍내 방향의 비탈진 골목길로 내려오면 붉은 벽돌과 목재로 기초를 세우고 기와로 지붕을 이은 한옥 예배당이 보인다. 구 강경성결교회이다. 골목 벽화가 교회의 역사를 대신 말해준다. 1919년 3월, 강경에도 만세운동이 한창이었다. 당시 교회 부지 매입을 위해 강경을 방문했던 영국인 존 토마스 목사는 그 틈바구니에서 일본인들에게 무차별 구타를 당해 부상을 입고 강제 투옥을 당하게 됐다. 이 사건은 영국과 일본 간 외교문제로 불거져 후에 일본이 목사에게 보상금을 지불하였는데 목사가 그 일부를 헌금하여 1923년 이 예배당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로 이 예배당 역시 가운데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휘장을 드리워 남녀의 예배 공간을 구분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출입문도 오른쪽 왼쪽 양쪽으로 냈다. 6.25 전쟁 중에도 거르지 않고 주일예배를 드린 일, 그 와중에 폭탄이 떨어졌으나 불발탄이었던 일 등 교회는 강경 사람들과 함께 긴 고난의 역사를 함께 감당해왔다.
구 연수당 한약방 맞은편에 위치한 현재의 강경성결교회는 일제가 민족문화 말살정책을 펼치며 강요한 신사 참배를 최초로 거부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24년 10월 11일 이곳 주일학교 학생들이 신사 참배를 거부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전국에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이 전개되었다고 한다. 교회 앞마당의 신사 참배 거부 선도기념비가 이를 증명한다.
뱃길 잘 뚫린 덕에 넘쳐났던 해산물로 일찍이 염장 기술이 발달해온지라 지도 어디쯤에 있는 줄은 몰라도 단박에 젓갈을 떠올리게 되는 강경이기에 오늘 읍내를 걸으며 만난 옛 강경은 의외이면서도 반갑다. 이왕 강경까지 왔으니 밥도둑 젓갈을 얼마 사갈 요량으로 게 중 오래되었다는 집을 물어물어 간다. 후한 맛보기 인심에 슬쩍 “옛날 강경이 그리 대단했다면서요?” 말을 건넨다. “아이고, 지금이야 논산 다음 강경이라 하지만 강경이 최고였죠.”
1905년 경부선, 1914년 호남선 등 철길이 물길을 대신하면서부터 강경은 조금씩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살만 했던 동네인데 6.25 전쟁이 결정적이었단다. 공공기관이 모여 있었던 강경은 집중 폭격의 대상이었다고. 근근이 이어온 뱃길도 1990년 금강하구둑이 건설되면서 완전히 끊겨 포구를 밝히던 등대가 머쓱하다. 이렇게 강경은 잠잠해졌다.
강변의 얕은 산마루 옥녀봉에 올라 강경 포구를 지나는 금강 물길과 그 너머 너른 평야를 한 눈에 담는다. 속이 다 시원해질 만큼 탁 트인 전망이다. 평양장, 대구장과 함께 조선 3대 장으로 또 원산과 더불어 2대 포구로 이름깨나 떨쳤다는 옛 강경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그 시절의 영광은 온데간데없지만 머리 꼭대기로 솟은 볕이 금강 잔물결 위로 뿌려대는 따스함만은 그대로이지 싶다. 이런 게 바로 시간여행이 아닐까. 느린 걸음으로도 서너 시간 동안 지난 100년의 강경 속에 오롯이 젖어든다.
위 글은 2014년 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농민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생활정보지 <전원생활>에 기고했던 '근대를 거닐다' 연재 가운데 2014년 4월호 '강경읍내'편의 원문임. (글 : 서진영 / 사진 : 임승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