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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영 May 04. 2016

광주 양림동

빛바랜 풍경이 빛고을에 빛을 더하네


5·18 민주화운동이라는 절대적인 인상을 머금고 있는 광주이기에 근대의 시간이 멈추어있는 양림동 구석구석은 상당히 의외의 풍경이었다. 무등산을 마주 보고 그 든든한 산자락에 싸여 있는 광주 천변의 오래된 마을. 그곳에 빛고을 광주에서도 가장 포근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데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 봄바람 좋은 날 양림동 둘레길을 걸어보자. 




동네 마을 어귀에 한 그루만 뿌리를 내리고 있어도 마음 든든해지는 것이 버드나무인데 버들 양楊에 수풀 림林자를 써서 양림동이라 이름 붙은, 한때 버드나무가 무성히 숲을 이루었다는 이 마을은 얼마나 푸르고 또 얼마나 정겨운 땅이었을까. 양림동은 우리나라 개화기 광주에 서양의 근대 문물이 가장 먼저 들어온 곳이다. 목포에서 물길 따라 광주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이곳 양림동에 자리를 잡았다. 천변 동네라 이동하기에도 좋았고 당시 어린아이가 죽으면 풍장風葬을 하곤 했는데 해발 108m의 야트막한 양림동의 뒷동산 격인 양림산에 그 터가 있어 자연히 땅값도 저렴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영향력 있고 의식도 깨인 양반가들이 양림동 일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모로 활동하기가 수월했다고 한다. 실제 오늘의 양림동에는 최승효 가옥과 이장우 가옥 등 구한말 양반네의 한옥과 서양 선교사들의 양옥이 같은 하늘 아래 빛을 받고 있다.    


  



빛고을에 자리 잡은 선교사들

관광안내소에서 받아 든 양림길 안내도를 들고 양림동 한 가운데 양림교회 앞에 섰다. 빨간 지붕이 인상적인 지금의 교회도 1954년에 세워진 것이니 꽤 오랜 세월을 품고 있는데 교회 역사는 그 보다 더 오래된 19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주뿐만이 아니라 목포를 시작으로 나주, 영광, 장성, 함평, 고창 등 전라도 곳곳에 선교활동을 전개했던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사 유진 벨, 한국명 배유지 목사가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예배당 자체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아니지만 양림교회는 근대기 양림동의 상징과도 같다.


 양림교회 곁의 오웬기념각은 딱 100년 전인 1914년에 세워진 근대건축물이다. 배유지 목사와 함께 광주에서 선교 활동을 전개한 클레멘트 오웬은 선교사이자 의사였다. 생전 자신의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그는 할아버지를 위한 기념각을 지을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이를 이루지 못하고 한센병 환자들을 돌보다 1909년 과로로 사망했다. 오웬기념각은 오웬과 그의 할아버지 윌리엄을 기억하기 위해 오웬의 손자를 비롯한 미국 친지들이 보내온 성금으로 건립했다. ‘IN MEMORY OF WILLIAM L. AND CLEMENT C.OWEN. 吳基冕乃其 祖事兼之紀念閣’ 영문과 한문을 동시에 표기한 현판이 그 사연을 알려준다. 



 개화기 당시 우리나라에서 지어진 서양식 건물 대부분이 붉은 벽돌을 사용한데 반해 오웬기념각을 비롯하여 양림동의 주요 근대건축물은 회색 벽돌을 사용해 조금 더 빛바랜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창문에 코를 대고 기념각 속을 들여다본다. 반듯한 정사각형 건물인데 속은 보다 입체적이다. 한쪽 모서리의 설교단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인데다 바닥은 설교단을 향해 경사져 있어 모든 시선이 설교단으로 집중되는 구조이다. 오웬기념각은 비단 기독문화유산에 그치지 않는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나아가던 때에 광주 지역의 연설이 울려 퍼졌고, 그 이듬해에는 광주 최초의 서양 음악회인 김필례 피아노 독주회, 1922년에는 독일 출신의 간호선교사 서서평의 장례식이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진 이곳 오웬기념각은 근대기 빛고을의 문화적 구심점으로 역할을 했다. 


선교사들의 흔적은 동네 골목을 따라 양림산 자락의 우일선 선교사 사택으로 이어진다. 오웬기념각과 마찬가지로 회색빛 벽돌로 지은 양옥이다. 1908년부터 현재 광주기독병원의 전신인 제중원 원장으로 의료 선교를 펼쳤던 윌슨 선교사의 보금자리이자 광주 지역 최초의 고아원으로 사용되었다. 1920년대 건축물로 광주에 남아 있는 서양식 주택으로는 가장 오래됐다고 한다. 선교사의 아이들이 마당에서 그네를 타고 놀았다는 귀동냥을 해서인지 마당 한쪽 나무에 매여 있는 투박한 나무 그네가 바람 타고 혼자 실룩거리는데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함께 실려 온다. 




양림산 자락에서 햇살보다 더 말간 미소를

수피아여자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우일선 선교사 사택 아랫길에 수령이 무려 400년을 훌쩍 넘긴 호랑가시나무가 있다. 지금에야 선교사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근대 건축물들이 양림동 곳곳에 자리 잡고 있지만 그들이 선교를 시작할 무렵 특별할 것 없었던 양림동에서 선교사들은 이 호랑가시나무 언저리를 본거지로 삼고 선교 활동을 펼쳐나갔다. 때문에 선교사들은 그들의 고향땅에서 가져온 다양한 수목과 함께 이 고목을 소중히 가꾸었다고 한다. 


호랑가시나무를 지나면 배유지 목사가 1908년에 설립한 수피아여자고등학교에 들어선다. 처음에는 그의 임시사택에서 교회를 찾는 아이 몇몇을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해 광주여학교를 설립하였고, 1911년 교사를 지으며 수피아여학교라 명명하게 되었다. 현재는 수피아여자중학교과 고등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학교 행정실에 출입 허가를 받고 천천히 교정을 거닐어본다. 3.1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수피아의 여학생들은 역사의 중심에 서서 제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 전통 있는 학교답게 수피아홀, 커티스 메모리얼홀, 윈스브로우홀 등 100여 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건축물들이 여전히 배움의 터전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음악수업이 한창인지 양림산 기슭을 타고 올라가 학교 맨 윗머리에 위치한 수피아홀에서 여학생들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오랜 세월 시들지 않은 것은 호랑가시나무뿐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노랫소리는 언제 들어도 싱그럽다. 기계음 하나 없고, 이어폰을 통하지 않고 듣는 노래는 참 오랜만이라 벤치에 앉아 한참 감상을 했다. 종이 울리자 아이들이 쏟아져 나온다. 낯선 얼굴임에도 저희들보다 어른이다 싶은지 깔깔거리다 말고 줄줄이 인사를 한다. 봄 햇살보다 말간 얼굴을 하고서. 비로소 실감이 난다. 배움이 당연시 여겨지지도 않았고 빼앗긴 땅에서 힘겨운 삶을 이어가던 이들에게 선교사들의 땀방울이 어떤 희망을 싹틔웠는지. 

 

수피아여자고등학교와 우일선 선교사 사택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 양림산을 오른다. 카딩톤길, 브라운길, 세핑길, 프레스톤길 등 양림동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이름을 딴 길이 이어지는데 그 끄트머리 양지바른 곳에 본래의 영어 이름보다 배유지, 오기원 등 한국명이 더 익숙해진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다. 미국 남장로교의 선교사 22인과 그의 가족, 후손들의 집단 묘역이다. 시들지 않은 꽃이 묘역 군데군데 놓여 있다. 묘역에서는 거대도시로 발전한 광주의 도심을, 그 반대편으로 광주의 진산이라 하는 무등산을 두루 조망할 수 있다. 묘역을 둘러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이들이 꽤 많다. 풍장 터가 있어 사람들이 가까이하기 꺼려하던 동산이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죽은 이들을 위한 땅이지만 이곳을 감싸는 공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꽤 자주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 젖혀 숨을 크게 들이마시게 될 만큼.

 

멀찌감치 고층 아파트가 배경이 되는 길가에도, 자전거가 천천히 바퀴를 굴리는 길 위에도 ‘楊林’ 두 글자가 선명하다. 이제 양림산에도 동네 길목에도 그 옛날의 버드나무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그 대신 양림동에 뿌리내린 선교사들과 그들로부터 자라난 근대문화유산이 풍성한 가지를 이루며 양림동의 버팀목이 되어 준다. 양림동은 여전히 푸르고 든든한 楊林이다.     




위 글은 2014년 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농민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생활정보지 <전원생활>에 기고했던 '근대를 거닐다' 연재 가운데 2014년 5월호 '광주 양림동'편의 원문임. (글 : 서진영 / 사진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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