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은 날의 이야기
머리맡에 두고선 잠들기 전에 읽어야지 했던 책이 있다. 워낙 좋아하는 작가의 장편이라 마음먹으면 하루 만에 거뜬히 읽고도 남았을. 그런데도 선뜻 책을 집어 들 수가 없었던 몇 달이 지났다. 만나서 '책이나 읽자' 했던 친구 녀석과의 아침 약속이 '일요일 아침'이라는 핑계로 흐지부지된 것이 얼마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이 책을 읽을 차례가 온 것 같은 느낌.
짐작했던 대로 작가의 문장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유려했다.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는지 빨리 읽어 내려가고 싶은 한편 천천히 음미하고픈. 그러던 사이 바람에 시달리던 잎사귀들이 잠잠하다 싶더니 창문으로 빗방울이 부딪혔다. 카페 바깥사람들의 발걸음이 빨라졌고, 카페 안 사람들의 말소리가 커졌다. 커피 향으로 가득한 카페였지만 어쩐지 수산물시장 한가운데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배는 고프지 않았지만 그 순간 빠에야가 먹고 싶어 졌다. 아주 잠깐 만들어 먹을까 급기야 '빠에야 만드는 방법'을 검색해봤지만 이내 고개를 젓는다.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카페에서 집까지 5분 남짓. 빗방울이 튀고 날려 얼룩덜룩해진 스타킹을 벗고 따뜻한 물로 씻었다. 그리곤 몸에 꼭 붙는 청바지에 크림색 블라우스, 양 옆 절개 덕분에 정장이지만 꽤 멋스러운 재킷을 걸쳤다. 필요도 없을 걸 알지만 매일 이것저것 다 챙겨 한 짐 어깨를 무겁게 하는 백팩 대신, 볕 한 점 없이 비 내리는 바깥 날씨 따위 아랑곳없이, 손잡이도 없는 클러치에 선글라스까지 챙긴다. 질끈 묵었던 머리카락을 풀자 제법 구불구불 자연스러운 컬이다. 머리를 조금 더 헝클인 다음 굽 높은 가죽 워커를 꺼냈다.
비를 밟을 준비가 끝났다.
다른 건 잘 모르겠고 빠에야 하나는 꽤 입맛에 맞았던 그 집까지 택시를 탔다. 지하철을 타나 택시를 타나 시간상 별반 차이가 나지 않을 거리인데 굳이 택시를 탔다. 불과 몇 천 원과 수고로움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허무한 기분이 들었지만 오늘은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이 되고팠다. 5년을 살았고, 3년이 넘도록 여전히 맴돌고 있는 일상의 테두리에서.
자리에 앉자마자 벨을 눌렀다. 빠에야와 맥주 한 잔을 시켰다.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돌아오는 질문은 "혼자세요?" 고개를 까딱였다. "몇 분이세요?"가 아니라 "혼자세요?" 그냥 좀 웃음이 났다.
읽던 책을 조금 더 읽는 사이 맥주와 함께 식전 빵이라며 러스크처럼 바삭하게 구운 빵과 아이올리 소스, 토마토챱소스를 가져다준다. 적어도 그 순간 그것만큼 훌륭한 애피타이저는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는 도중에 빠에야가 나왔다. 혀를 입천장으로 탑 탑 탑 차댈 때마다 콧김으로 나오는 그 신선한 비린내가 좋아서 먹으면서도 계속 입맛을 다셔댔다.
사실은 빠에야가 먹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낯선 곳으로 떠나고 싶었던 거겠지. 혹자들이 다 안다는 듯이 쉽게 내뱉는 '나의 뻔한 습성'. 이건 입버릇처럼 투정 부리듯 "아, 여행 가고 싶다."고 말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굳이 설명하고 싶지도 않은 그런. 때문에 오늘은 "혼자세요?"라는 질문이 그리 거슬리지 않았을지도.
맛은 있지만 꽤 값나가는 빵을 전리품으로 들고도 모자라 내일 점심 도시락을 쌀 장까지 봤다. 비는 그치지 않았다. 분명 한 손은 우산에 저당 잡힐 게 뻔한데도 굳이 짐을 만든다. 토마토 한 바구니와 파프리카. 꽤 무게가 나가는 봉지를 한쪽 팔에 걸고 지하철에 올랐다. 여행을 떠날 때 멋을 부린 것과 달리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서글픔까지 대신할 리추얼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지하철역에서 집으로 걸어오는 길, 투명한 비닐우산을 쓴 덕에 자꾸만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곁을 쌩하니 지나가는 차들 덕분에 옷은 이미 지저분하게 젖었지만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비현실적으로 투명하고 탱글 하다. 고개를 기울여 우산을 낀 쪽 팔에 봉지까지 걸고 있었으니 분명 피부가 발갛게 쓸리겠지만 한참을 바라봤다. 적어도 오늘 밤에는 이렇게 계속 내려주었으면.
따뜻한 물로 다시 샤워를 하고 출근할 준비를 마쳤다.
혹여 내일 늦잠을 자더라도 세수만 하고 튀어나갈 수 있도록.
보일러를 틀고 창문을 열었다.
양치질은 했지만 과자 봉지를 열었다.
이제 다시 책을 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