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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영 Jun 01. 2016

대전 소제동 철도관사촌

기찻길 너머엔 세월이 머문다


호수의 잔잔한 물결만이 겨우 소란을 일으킬 뿐 그저 한촌閑村에 불과했다는 대전에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905년 경부선 철길이 놓이면서부터다. 저 멀리서 요란한 소리를 내더니 머리칼 날리는 바람을 몰고 온 기차는 한밭을 대한민국 교통의 요지이자 중심도시로 탈바꿈시켰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기찻길 옆, 대전역 지척의 소제동은 시간이 멈춘 듯 100여 년 전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있다.



대전역사에서 동광장으로 가는 길에서 주차장 쪽을 바라보면 묘한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수십 대의 자동차가 허름한 목조 건물 하나를 에워싸고 있다. 본의 아니게 포위 당한 건물은 강경에서 보았던 일제강점기 적의 미곡창고와 많이 닮았다. 아니나 다를까 철도보급창고라고 했다. 공식적인 명칭은 ‘구 철도청 대전지역사무소 보급창고 3호’이다. 철도청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물자를 이동하고 보관하는 용도로 지은 것이다. 1956년에 지었다니까 엄격하게 따지면 (개항 무렵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까지를 이르는) 근대기의 것은 아니지만 일제강점기의 건축술을 그대로 적용한 데다가 근대 목조 건축물 대부분이 한국전쟁을 거치며 훼손돼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기에 그 희소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등록문화재로 제168호로 지정되었다. 대전의 근대를 거니는 여행은 여기서부터 시간을 거꾸로 돌린다.      




솔랑산 언덕바지로

땅거미처럼 퍼져나간 근대의 흔적

철도보급창고를 기점으로 멀찌감치 보이는 솔랑산 언덕바지 계룡공업고등학교 일대의 소제동. 본래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었던 자리다. 이름난 중국 소주의 호수 못지않다 하여 소제호蘇堤湖라 이름 붙었을 만큼 풍광이 좋았다고 한다. 우암 송시열이 그 모습에 반해 집을 짓고 살았다. 소제동 언저리의 송자고택이 바로 그 집이다. 그러나 일제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고요하던 호숫가의 풍경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경부선 철도에 이어 호남선까지 대전을 지나게 된 것이다. 사실 근대 이전의 대전은 그리 주목받았던 땅이 아니다. 일제에겐 이 점이 주요했단다. 상대적으로 보수성과 지방색이 적어 무슨 일이든 도모하기 좋은 땅이란 뜻이니. 1905년 대전역이 문을 열자 많은 일본인들이 대전으로 유입되었다. 1907년 소제호 주변에 신사가 세워졌고 호숫가도 일본풍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1927년에는 그마저도 매립되고 만다. 솔랑산을 깎아낸 흙으로 호수를 메워 만든 땅에는 소제동이라는 이름만이 남았다. 이 땅의 새로운 주인은 철도 관리자와 기술자들이었다. 소제동과 철도관사촌 사이에 등호가 생긴 것도 이때부터다.


소제동 철도관사촌은 땅거미처럼 낮게 깔려있다. 마을이 대전역사 동광장에서 계룡공업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데 그 사이에 빼곡한 주택 지붕이 워낙에 낮았기 때문이다. 철도청 직원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는 5층 높이의 철도아파트 한 동이 동네에서 가장 높다. 가가호호 낮은 지붕이 촘촘하게 맞닿은 모습에 땅거미에 비유했지만 동네는 어둡기는커녕 싱그러운 기운이 맴돈다. 머리 위로 그만큼 탁 트인 하늘이 펼쳐지고, 지붕 아래 아주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는 땅엔 푸른 이파리 무성한 나무를 심어 가꾸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것이 옛 철도관사인지 알 수가 있나. 얼추 봐서는 그 집이 그 집이다. 아직 해지려면 한참이나 남았는데 일찍이 동네 슈퍼 앞에서 약주를 시작한 어르신에게 여쭙는데 그 옆을 지나던 어르신이 “저렇게 생긴 게 죄다” 관사란다. 어르신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기찻길과 함께 근대도시로 성장한 대전. 누가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 했나. 한때 대전 최고의 부촌 소제동에서 근대를 곱씹는다.
대전역 동광장 주차장 가운데에 근대문화유산인 철도보급창고가 60여 년 가까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철도관사촌의 다양한 표정을 기록했던 소제사진관



기찻길 따라 100년,

누가 기찻길 옆 오막살이라고 했나

본래 관사촌은 대전역 주변 3개 지역에 약 100여 채가 있었다고 한다. 그중 북관사촌과 남관사촌은 한국전쟁 때 대부분 파괴되고 현재 소제동 솔랑시울길을 따라 형성된 동관사촌에 약 40여 채가 남아있다. 어르신이 가리킨 ‘저렇게’는 일단 주변 집들보다 지붕이 조금 더 높고 뾰족하다. 지붕 아래 벽면에는 목재로 가로 살을 넣은 환풍구가 있다. 그 밑으로 문패처럼 달린 것이 있다면 틀림없이 관사다. 그 문패가 바로 철도관사 번호판이기 때문이다. 번호판이 없더라도 관사임을 알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지만 현재 남아 있는 관사 대부분은 한 지붕 두 가족이다. 전문용어로는 ‘2호 연립주택’이라 하는데 건물 중앙의 벽을 경계로 주택 건물 한 채에 두 가구가 양쪽에 나누어 사는 형태다. 때문에 집이 동네 다른 집들보다 상대적으로 기다랗다. 또 대문을 들어서면 마당 양쪽에 좌우 대칭이 되는 창고가 있다. 철도관사의 기본 유형이라고 한다.


솔랑시울길과 시울1길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소제관사 42호에는 소제사진관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소제사진관은 근래 관사촌의 새로운 이정표가 된 곳이다. 대전의 근대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는 대전근대아카이브즈포럼이 2012년 이곳에 입주하여 소제동 사람들의 삶을 글과 사진으로 기록했다고 한다. 이후 이곳을 중심으로 다양한 공공 프로젝트들이 진행되고 있어 소제동을 찾는 사람들이 줄곧 기념사진을 남기는 곳이기도 하다.


“저게 관사라고? 허, 난 여태 몰랐네. 그렇잖아도 사진기 들고 많이들 오드라고.” 약주를 들이킨 어르신이 혼잣말을 했다. 어쩌면 근대유산이니 뭐니 하는 것은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척이나 성가신 일일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기록이랍시고 기웃거리는 것이 늘 조심스러운데 흐르는 세월에 농익은 어르신들은 오히려 너그럽다. 관사촌에 일반인들이 들어온 것은 1970년에 이르러서다. 현재 소제동 토박이 가운데는 그때를 전후로 들어온 사람들이 꽤 많다고. 지붕이며 벽이며 곳곳에 녹슨 슬레이트가 덧대져 있고 골목골목 리어카가 대기하고 있는 오늘의 소제동은 얼핏 달동네가 떠오르는데 당시에는 대전에서 손꼽히는 부자 동네였단다. 철도 관계자 중에서도 꽤 영향력 있는 관리자급과 기술자들이 이곳 관사에 살았기 때문이다. 낡긴 했어도 적산가옥 특유의 아우라가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     


목척시장 골목. 누군가는 재개발에 발목 잡힌 동네라 고개를 젓지만 이곳에도 해가 들어오고 꽃이 핀다. 그리고 사람이 산다.
골목골목 삼삼오오 모여 수다 삼매경에 빠진 목척시장 어르신들
지역의 예술가들이 참여한 '마을 소생 프로젝트'로 목척시장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간판은 내걸고 있지만 장사를 하지 않는 집이 더 많아 보이는 목척시장이 젊은이들의 손길로 생기를 얻었던 날



버드나무 아래에

근대의 바람이 솔솔, 새로운 씨앗이 훨훨

계룡공업고등학교 옆으로 난 솔랑시울길 끝에서 선화로를 따라 대전천을 지나면 또 하나의 오랜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걸어서 15분 남짓 소제동과 함께 대전의 원도심에 해당하는 은행동이다. 그 가운데 일제강점기부터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꽤 번성했던 시장이 있다. 목척시장이다. 간판은 내걸고 있지만 장사를 하지 않는 집이 더 많아 보이는데, 맞았다. 허름한 상가 안에서 동네 어르신 몇몇이 화투놀이를 하는 소리가 동네에서 가장 소란스럽게 느껴질 만큼 목척시장은 소제동처럼 옛 이름만이 남은 시장이다. 그 시장 끄트머리에 뜻밖의 공간이 있으니 마당을 사이에 두고 담쟁이넝쿨 빼곡한 담장과 마주 보고 있는 카페 안도르. 일제강점기 오늘날의 대전시장 격인 대전 부윤이 기거했던 관사인데 오랜 기간 방치되다가 카페 겸 문화공간으로 단장을 했다.


마당 입구에는 2층 높이의 관사보다 키 큰 향나무가, 마당 안쪽에는 분홍빛 꽃 틔운 모과나무와 반쯤 기울어진 채로 가지를 뻗고 있는 버드나무가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다. 커피 한 잔을 비우고 볕 좋은 마당 테라스에 앉았는데 버드나무 이파리를 간질이는 바람에 버드나무 꽃씨가 눈송이처럼 흩날린다. 참말로 아련한 향수가 밀려온다. 이 카페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 공연과 전시가 열리고 주말이면 숨 죽은 시장통에 젊은이들이 주축이 된 벼룩시장이 열리기도 한단다. 그렇지, 옛 정취 담뿍 시간이 멈춘 듯하지만 그곳이 어디든 시간은 결코 멈추는 법이 없다. 버드나무 꽃씨처럼 소리 없이 흩날려 언젠가 새로운 싹을 내밀 테지. 때문에 근대로의 걸음은 언제나 시공을 초월하는 여행길이 된다.      


목척시장 골목 끝에 위치한 카페 안도르. 1930년대 대전부윤 관사를 카페로 단장했다. 고풍스런 옛 모습이 고스란하다.



위 글은 2014년 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농민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생활정보지 <전원생활>에 기고했던 '근대를 거닐다' 연재 가운데 2014년 6월호 '대전 소제동 철도관사촌'편의 원문임. (글 : 서진영 / 사진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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