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원도심 원일로 일대
청량리역을 출발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한 시간여 만에 원주역에 도착했다. 이렇게 가까웠나 싶을 만큼 적어도 나에게는 강원도도, 원주도 조금은 낯선 곳인데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이 도심 한 복판에 조선의 기와지붕과 일제강점기의 서양식 건물 그리고 초고층 빌딩이 나란히 서 있다. 손에서 당최 놓을 줄 모르던 휴대전화를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고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묘한 시공으로 걸어 들어간다.
조선팔도라는 말이 있다. 조선시대에 지방 행정을 8개의 '도'로 나누어 관할했던 데서 나온 말이다. 각 도마다 관찰사가 거처하는 관청을 두었는데 이를 감영監營이라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도청쯤 된다. 조선시대에는 치악산 자락 원주에 강원감영을 두었다. 오늘날의 강원도라는 명칭도 강릉과 원주에서 각각 한 글자를 딴 것이라 하니 원주는 단연 강원 지역 행정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근대기를 이야기할 때 원주는 물론이고 강원도 지역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개항지와 수도 서울 그리고 일제가 놓은 호남선과 경부선 등 주요 철도가 지나는 수탈과 대륙침략의 주요 거점에서 비켜나 있는 까닭이다.
새하얀 급수탑이 이정표가 되어
개항의 기운도 느지막이 도달하였고 원주역이 들어선 것도 1940년에 이르러서였지만 이곳에도 근대의 시간은 재깍재깍 흘렀다. 낯선 역사에서 갈피를 잡아준 것은 선로 건너편에 우뚝 솟은 급수탑이다. 증기기관차가 오가던 시절의 흔적이다. 높이 18미터로 흔적 치고는 거대하다. 새하얀 칠을 해놓아 더욱 도드라진다. 1942년 원주역을 지나던 증기기관차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꼭대기에 물탱크와 환기창을, 그 아래로 펌프 시설을 갖추고 있는 구조는 1940년대 급수탑의 전형이라고 한다. 1950년대에 디젤기관차가 등장하면서 쓸모를 잃고 역사 한쪽에 덩그러니 남았다.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철도 시설물로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138호로 지정된 것도 의미가 있지만 원주역 사거리에서부터 시작되는 근대 여행의 이정표로도 이만한 것이 없다.
원주역 사거리에서 강원감영 방면으로 일방향의 직선대로인 원일로가 뻗어 있다. 원도심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번화한 중심 상권인데 대로변 따라 이제는 잘 사용하지 않는 ‘역전’이라는 상호명이며 두 자리 국번의 전화번호를 그대로 둔 간판이 드문드문 남아 있다. 그 언저리에서 첫 번째 목적지 서미감병원 터를 찾았다.
서미감병원은 1913년에 미국 내 스웨덴교회의 지원을 받아 개원한 원주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이다. 한국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지만 옛 병원 터에 현재 연세대학교 원주 세브란스 기독병원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붉은 벽돌로 지은 것이며, 창틀을 흰색으로 칠한 것, 지하실을 갖춘 2층 건물이라는 점 등 옛 서미감병원과 많이 닮아있는 당시 선교사들의 숙소가 남아 있어 옛 모습을 그려볼 수가 있다.
시장 속을 헤집고, 시장 밖을 에둘러
원일로 주변으로 크고 작은 시장과 먹거리 골목이 이어진다. 그 가운데 원주 중앙시장은 해방 이후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된 전통시장이다. 처음에는 난전 형태였는데 1970년에 지금의 2층 상가형 도매시장으로 단장했다. 말만 들으면 요즘의 신식 아케이드 건물 같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아니올시다. 겉보기 허름해서만은 아니다. 이름난 음식점과 한복집 등의 점포가 늘어선 1층은 여느 시장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2층으로 올라가면 상가라기보다는 살림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양새며 상가마다 아직 연탄난로를 때는 모습이 빛바랜 사진첩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시장이 아니라 70~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속 골목 풍경이 오버랩된다. 1980년대 후반 들어 도심 공동화 현상으로 인해 공점포가 생겨나니 도매상가에 바느질하는 집이며, 국밥집, 점집 그리고 살림집까지 들어오면서 지금과 같은 독특한 구조를 갖게 된 것이라고 했다. 이곳의 터줏대감은 시장이 생길 때부터 한 자리에서 문을 열고 있는 신원이발관이다. 깔끔한 양복 차림의 노 이발사는 경력 70년의 베테랑. 40년 된 독일제 드라이기를 손에 쥐고 오래됐지만 이만한 게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서 지난 세월이 그대로 묻어난다.
중앙시장을 거쳐 2, 7일마다 열리는 오일장인 민속풍물시장 자리로 이어지는 문화의 거리 중간 즈음 또 하나의 근대문화유산을 발견한다. 스탠다드챠타드 은행 원주지점은 태생도 은행이니 1934년에 세워진 조선식산은행 원주지점이었다. 원주 최초의 은행이지만 그 시절 식민지 수탈기구였던 동양척식회사의 실질적 지배를 받으며 운영되었기에 우리로서는 온전한 의미의 은행이라 할 수는 없겠다. 모르타르 질감의 건물은 단층이지만 천장이 높고 정면에서 보면 반듯한 좌우대칭, 창문도 세로가 길어 수직성이 강조되는데 이러한 점은 일제강점기 은행 건축물들의 특징이라고. 건물 뒤로 돌아가면 그보다 작은 규모의 집채 두어 개가 이어져 훨씬 입체적인 모양새다. 은행 깊숙한 곳에 있을 법한 금고문을 연상시키는 외벽 철문도 인상적이다.
진위대가 머물렀던 감영에서 민주화의 요람 원동성당까지
문화의 거리를 빠져나와 원일로 건너의 강원감영으로 발을 옮긴다. 1395년부터 1895년까지 무려 500년 간 강원도의 중심지로 역할하였으나 감영이 춘천으로 옮겨감에 따라 이후에는 원주 진위대鎭衛隊 본부로 사용되었고, 1907년 진위대 해산 후에는 일본 헌병수비대가 머물기도 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대부분이 소실되었는데 출입 문루인 포정루와 관찰사의 집무실인 선화당 등 일부가 남아있다. 일부라지만 도심 한가운데 너른 마당을 두고 있어 과거의 당당한 풍채를 짐작케 한다. 한편으로는 열어젖힌 창호 밖으로 화려한 광고판이 보이고 감영 주변에 들어선 일제 때의 상가 건물과 초고층 빌딩이 감영의 기와지붕과 하나로 이어지는 스카이라인을 만들고 있으니 뒤섞인 시간 속에서 일순간 귓가가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원일로 끄트머리에 위치한 원동성당은 1970년대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 시인 등이 중심이 되어 반독재 투쟁을 전개하였던 원주 지역 민주화 운동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다. 본래 1913년 고딕 양식의 붉은 벽돌 예배당으로 지어졌으나 한국전쟁 중에 폭격으로 모두 불타고 현재의 성당은 1954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시멘트 벽돌 건물이지만 외벽을 다소 거칠게 마감하고 일정 간격으로 줄눈을 넣어 석조 건축물의 분위기를 냈다.
해 질 녘의 원동성당은 더욱 중후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조심스레 성당 안으로 들어섰다. 미사 시간이 좀 남았는지 반주자 한 사람이 텅 빈 성당을 성가 반주로 채우고 있었다. 아무도 없지만 가득 차있는 것만 같은. 이럴 때에는 종교에 관계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혼자만의 시간을 누려도 괜찮다.
원주역 사거리에서 원동성당까지 1.5km 남짓의 원일로 일대를 거니는 동안 횡단보도를 몇 번이나 건넜는지 모르겠다. 쉼 없이 일직선 대로를 걷는다 치면 15분으로 충분한데 시간을 곱씹으며 다닐라 치면 서너 시간으로도 아쉽다 느껴진다. 뒤돌아서는 길에 솜사탕 노점을 마주했다. 모터로 돌아가는 구식 솜사탕 기계를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는데 나만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볼품없는 차림의 할아버지가 휘뚜루마뚜루 만드는 옛날식 솜사탕이지만 아이 손잡고 가던 어른들이 먼저 발길을 멈추고 지갑을 열었라. 돌아서는 아쉬움은 이렇듯 달달한 추억으로 달래진다.
위 글은 2014년 2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농민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생활정보지 <전원생활>에 기고했던 '근대를 거닐다' 연재 가운데 2015년 3월호 '원주 원일로'편의 원문임. (글 : 서진영 / 사진 : 임승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