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26 _ to 아버지
자기 몫을
걷어 간다, 세월은
예순여덟번째 2023
생신을맞으며 0726 0828
예순여덟 해 전
우리 모두의 뿌리가
시작됐음을 떠올리며
매년 어김없이 찾아오는 여름입니다.
매해 그렇게 무더웠던 것 같아도, 가끔씩 우리의 나이를 들춰볼 때면 이 무더위는 기껏해야
제게는 서른여덟번째, 아버지・어머니에게는 예순여덟번째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온 일 같지만 정작 많지 않은 숫자라는 사실을 발견하면, 여름마다 덥다고 치근대던 모습이 떠올라 이내 멋쩍어집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도 잠시.
얼마 전 작고한 류이치 사카모토를 통해 저는 ‘나이듦에 관한’ 생각을 새삼스레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Because we don’t know when we will die
삶이 무한하다 여깁니다
We get to think of life as an inexhausible well
우리는 앞으로 보름달을 몇 번이나
How many more times will you
더 볼 수 있을까요?
watch the fullmoon rise?
아마도 스무 번
Perhaps, 20
모든 게 무한한 듯 보일지라도
and yet it all seems limitless.
- 폴 볼스, 소설 <The Sheltering Sky> 중..
어른이 된다는 것, 나이를 든다는 것에 각자 나름의 정의를 내릴 수 있겠지만
저는 인생이 무한대가 아니란 것을 깨닫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매번 덥다고 치근대던 여름을 앞으로 얼마나 몇번이나 더 겪을 수 있을까.
저 하늘의 밝은 보름달을 앞으로 몇번이나 더 마주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 하루하루가 더 소중하다고 여겨집니다
고희를 앞둔 아버지・어머니가 보기엔 아직도 어린아이일수도 있지만,
저도 어느덧 불혹,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몸이 낡아가고, 살은 늘어가며(그러다 이내 다시 빠지기를 반복하며)
‘볼품 없는 상태로의 진입’ 혹은 몸 마저 ‘무질서의 영역’으로 접어들어 정돈되지 않는
이른바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의 상태인 것 같습니다.
- 종종 거울 속의 모습을 보며 슬퍼지는 이유가 이런 사실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역으로 (혹은 역설적으로)
‘나이듦’은 정돈의 상태로 향하고 있는 과정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욕심이 줄어들고, 나의 분노를 객관화해서 바라볼 줄 알며,
나아가 그것을 토대로 반성하며, 종국엔 내려놓는 시도를 할 줄 아는 것
그리고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그냥 <해야 하는 것(Just do it)>이 곧 인생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들의 정리 속에서 저는 세월을 느낍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대로 ‘세월이란 것은 역시 자기 몫을 걷어가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혹의 아들은 여전히 불안합니다
인생의 가치를 어디에 두고 어디를 향해 가야할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더 의미있는 삶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럴때 아버지・어머니의 모든 것에서 길을 찾습니다.
‘나이듦’을 인지할 때 오는 무력함을 어떤 슬기로 헤쳐나갔는지를 생각합니다.
십대 때 아침 결에 들었던 음악을 찾아 들으며, 때론 어릴 적 물려받은 신앙에 기대기도 하며
힘을 얻습니다.
이준이를 낳고 키우며 ‘부모’에 대한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합니다.
얼마 전, 아파트 산책로를 내려갔다가 이준이가 크게 울음을 터트린 적이 있습니다. 화분 흙을 비우러 두 손이 무겁던 지수와 저를 두고, 이준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놀이터로 향하고선 이내 시야에 아빠엄마가 없으니 울음을 터트린 것이지요. 어른의 기준으로 편하게 이준이를 놓아준(?) 것 뿐인데, 이준이에게는 처음 경험하는 광활함이었나봅니다.
이 경험이 제게 준 일종의 깨달음이 있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경험해야 하는 이 세상의 경계선을 만들어주는 존재라고 저는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 그간의 저를 돌아보면 이준이에게 줄곧 ‘NO!’만을 외쳐왔던 것 같습니다. 이준이가 홀로 탐색할 심리적, 물리적 공간을 넓혀주기보다, 넘어져서 상처나는 것이 겁이 나서.. 질서를 모르는 망나니처럼 되는 것이 무서워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경계선을 좁게 좁게 만들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인지하지 못한 이준이의 세상 경계선이 얼마나 좁았으면, 그 잠깐의 3층 산책로에서의 벗어남이 공포가 되었을까 라는 생각.
아이를 생각하면 한없이 부족함을 느끼는 게 또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 합니다
저에게도 경계선이 있었겠습니다.
그 경계선을 인지하면서부터 저의 세월은 시작이 되었을테니까요.
때로는 그 경계선이 좁다고 느껴진 적도 있었고, 때로는 그 경계선이 어디인가 찾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몫을 걷어가는 세월을 따라 오니
이제는 제법 홀로 항해를 잘 해내고 있는 듯 합니다
아직도 하루하루가 서핑보드에서 금방이라도 균형을 잃고 넘어질 것만 같은 시간들이지만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 새로운 경계선을 만들고 있습니다
얼마 전 어머니가 수화기 너머로 고백한 말을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너는 내 우주였다’
저에게 아버지・어머니는 여전히 등대이며, 현재진행형-ing의 ‘우주입니다’
2023년 7월 21일,
무더운 한여름 중에, 아들 승용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