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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수 Feb 20. 2017

베를린에서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았다.

홍상수, 김민희랑 같이 봤다.

*약간의 스포일러를 포함한 주관적인 여행기+영화제관람기 입니다.

 

실제 영화가 상영되었던 'Berlinale palast' 상영관


관객석이 3층이나 되는 화려한 극장안. 나는 맨 앞줄에 앉아 설렌마음으로 거대한 스크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좌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제각기 웅성였다. 슬슬 영화가 시작되려나, 싶은 순간 박수갈채가 쏟아지며 극장안으로 홍상수와 김민희가 들어온다. 관객들에게 답례의 인사를 보내며 극장 중앙 좌석에 착석하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묘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 저 사람들이랑 같이 영화 보는 거야?'  

상영관 외관. 이 레드카펫에서 처음 그들을 마주쳤다.


매년 2월에 열리는 베를린날레는 세계 3대 영화제 중 가장 대중에게 사랑받는 영화제라고 한다. 출품작은 기간 동안 3-4회씩 상영되는데, 보통 첫 회 상영에 출연진들의 무대인사와 Q&A 타임을 가진다. 대학 수강신청을 방불케하는 예매 전쟁을 뚫고 운 좋게 첫 회 상영 표를 구했다. 베를린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자들끼리는 의견이 분분했다. '과연 홍상수와 김민희가 무대인사에 나타날 것인가?' 당일이 되니 쓸데 없는 토론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영화관 입구에서부터 레드카펫을 입장하는 홍상수와 김민희를 마주쳤으니까.


한국 대중문화사의 역사적인 순간
레드카펫으로 입장하는 그들.

베이지색 쉬폰 소재의 하늘거리는 드레스로 몸을 감싼 김민희와 그녀를 서포트하는 홍상수 감독. 이 순간은 한국 대중문화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순간이라는 생각에 심장이 뛰었다. 몇십 년이고 자료화면으로 회자되겠지?

상상했던 것보다 취재진과 한국인이 많지 않아서 인지, 레드카펫을 위의 그들의 모습은 꽤나 편안해 보였다. 나도 남에게 치이지 않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이 여유가 참으로 이상했다. 개인적으로 그들에 대한 어떠한 판단도 하지 않은 상태지만, 머릿속으로 오늘 아침 페이스북 피드에서 본 폭발적인 조회수의 이 둘의 기사, 거기에 달린 각종 날카로운 악플들이 순간 한바탕 스쳐 지나갔다. 내 앞에 펼쳐진 이 평화로운 상황과는 아예 다른 세상 얘기같았다.

여유로운 걸음


영화제에서는 상영이 시작되기 전 프로그래머가 무대에 올라 영화를 소개한다. 정장 차림에 빨간 보타이를 맨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프로그래머가 무대에 올랐다. 영화인이었을 그는 원래 홍상수 영화를 좋아했는지, 영화 소개에 꽤 공을 들이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그 나름으로 발음된  ‘항상수’ 디렉터의 '바뮈 해벼네서 호운자-'가 시작되었다.



김민희를 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 포스터


영화 소감 첫 번째. ‘이거 정말 괜찮은 거야?’

참 직설적인 영화다. 영화가 한국에서  가져올 파급 효과를 생각하니 보다가 소름이 돋았다. 아마 줄거리보다는 대사 하나하나로 기억될 영화라고 생각한다. 줄거리자체도 세다. 김민희가 분한 '영희'는 늙은 유부남 감독과 사랑에 빠진 영화배우. 김민희, 아니 영희의 대사는 자신을 보는 대중의 시선에 대해 솔직하게 반박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 떠다니는 강력한 단어와 문장들. 하나 꼽기도 어렵다.  '불륜', '욕망', '곱게 죽고 싶어요', '제대로 사랑받은 적이 없으니 인생에 집착하는 거 아니에요?'... 갑자기 지금 내 뒤편 어딘가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을 둘은 손을 잡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영화 소감 두 번째. '진짜 둘이 가까운 사이구나'

영희가 ‘잘생긴 남자 만났는데 다 부질없더라’, 한숨을 내쉬자 누군가의 얼굴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이처럼 김민희의 모든 대사 한마디가 연기인지 자신의 처지에 대한 토로인지 구분이 안된다. 분명 김민희의 얘기인데, 이걸 홍상수가 썼다고 생각하니 신기할 정도다. 대체 어디까지가 그들의 외침이고, 어디까지가 극의 전개를 위한 대사인 걸까. 홍상수 감독은 매일 아침 하루 분량의 대본을 쓴다던데, 그럼 이렇게 김민희의 이야기가, 홍상수의 펜 끝에서 나와, 다시 김민희의 목소리가 될 정도로 이 둘은 가까운 거구나, 라고 생각했다.


영화 소감 세 번째. '김민희를 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는 영화'

그날 영화제 속에 관객 앞에 선 김민희는 하나의 꽃처럼 보였다. 함부로 그 둘을 보며 '역시 사랑하는 사이' 같은 프레임을 씌우려던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김민희는 홍상수로 인해 빛나는 그날의 주인공인 게 느껴졌다. 모든 시선이 홍상수와 김민희에게 가있는 데, 홍상수의 시선도 김민희에게 가있으니 김민희에게 더욱 집중됐달까.

영화가 끝난 뒤 무대인사.

영화 안에서도 오롯이 '영희'가 한껏 돋보인다. 보통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크게 존재감을 떨치던 남자들이 조금은 뒤로 물러난다. 그때문에 한껏 두드러지는 김민희의 독백과 감정선은 강력한 흡입력을 갖는다. 그게 김민희의 연기력 때문인 지, 연출 때문인 지, 아니면 그 둘이 합치된 독특한 상황 때문인 지는 모르겠다.

영화가 상영되는 이 베를린의 분위기는 확실히 한국과 달랐다. 영화제 경험이 많지 않은 내가 느끼기에도 상영 내내 분위기가 훈훈하니 좋았다. 홍상수 영화가 외국에서 인기 많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독일 한인대잔치일 줄 알았던 관객석에는 외국인들이 가득 차 있었고, 관람객들 모두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어 소소한 유머까지도 함께 즐거워했다. (특히 ‘독일 남자들 그게 참 크다’라는 대사에서 다들 빵 터졌다. 자기들도 아나보지.) 해변에 홀로 서있는 김민희의 모습이 화면에 꽉 찬 채로 마지막 씬이 끝나자, 극장엔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글을 쓰던 중에 김민희가 베를린 국제영화제의 여우주연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녀는 정말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홍상수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인터뷰 중이던 홍상수.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기 전 우리 일행의 입장 타이밍은 정말 절묘했다. 그 둘이 레드카펫을 입장해 극장 내 대기실을 들어가는 순간까지 거의 같은 템포로 걸었다. 한국인이 많지 않은 탓에, 입장 당시 그들에게 가장 가까웠던 한국인은 우리 일행 셋이 다였다. 레드카펫 위에서 맨 처음 홍상수와 김민희를 발견하자마자, 잔뜩 흥분해서 정신없이 핸드폰 카메라로 찰칵찰칵 찍어댔다. 그런데 레드카펫 중간에 멈춰서 카메라에 인터뷰를 하던 그가 갑자기 우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응시' 라는 단어가 더 맞을까. 원래 연예인들을 보면 '눈 마주쳤어!'라는 착각 한 번씩은 하게 되지만, 그의 시선은 한 5초에서 10초 정도로 길게 지속됐다. 그 피할 수 없던 시선에 몸이 바짝 경직될 정도였다. 그는 우리, 한국인들, 을 쳐다보는 듯했고, 그 눈빛에 갑자기 그들을 마구 찍어대던 손이 부끄러워졌다. 셔터를 누르던 손이 알 수 없는 민망함에 버벅대기 까지했다. 어떤 감정이 담긴 눈빛이라고는 쉽사리 정의되지 않지만, 지금도 그 눈빛이 생생하다. 누군가는 '기에 눌렸구나?'라고 했고, 누군가는 '너네도 날 평가하니'하는 눈빛이었냐고 했다. 모르겠다. 어쨌든 그의 눈빛은 나를 변명하고 싶게 만들었던 건 확실하다.  순간에 나는 불쑥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아니에요 난 님들 스캔들에 대해 아무 생각 없어요, 그냥 영화 보러 온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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