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늦작가 Dec 11. 2023

엄마 이야기로 홍보팀에 입사했다.

인생의 가을을 넘고 있는 엄마를 떠올리며 적어 본 '가을 단상'

여전히 어설픈, 30s


지금부터 '가을단상'이라는 주제로 글을 써주시면 됩니다.

시간은 1시간 드리겠습니다.



나라고 다를 바 없었다. 취업의 문은 좁고 좁았다. 귀하를 모시지 못해 대단히 죄송하다는 영혼 없는 탈락 이메일도 지긋지긋했다. H기업의 홍보팀으로 지원했다. 영업파트를 많이 뽑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냥 내가 하고 싶은 홍보직무에 용기 있게 도전하고 화끈하게 떨어지자고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떨어질 것 같았는데, 자꾸 다음 라운드로 진출했다. 자기소개서와 서류심사에서 합격하고 1차 실무진 테스트에 통과한 나는 최종 임원진 면접 전에 글쓰기 테스트를 하게 되었다.




'가을 단상'에 대해서 글을 쓰라고 했다. 기사문이나 신제품 홍보 아이디어 같은 것들을 쓰게 될 것이라는 취업컨설턴트의 조언과는 사뭇 달랐다. 가을에 대한 짧은 생각들을 적어보라는 이야기니 그냥 마음 편하게 글을 써보자. 떨어지면 말지.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그 순간 너무나 뜬금없게도 군대에서 들었던 라디오 내용이 생각났다.




인생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면, 당신은 어느 계절에 살고 있습니까?



라디오 DJ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 인생의 가을을 지나고 있는 엄마가 생각이 났다. 인생이 힘들고 바닥을 칠 때마다 부르고 싶은 이름. 엄마. 엄마의 가을에 대해서 적어보자. 모나미 153 볼펜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엄마가 보지 못할 글이라고 생각하니 글이 더 잘 써졌던 것 같다.




글의 전문을 남겨본다.


제목 : 어느 계절에 살고 계십니까?


라디오가 물었다. 어느 계절에 살고 있는지. 높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이 가을을 살고 있는 엄마가 떠올랐다. 백세시대, 인생의 반을 넘기고, 소란한 청춘과 시끄러웠던 성장통을 끝내고 엄마는 가을을 살고 있다.


<엄마의 봄>

아들을 바랐던 외할아버지는 셋째가 딸이라는 걸 알고는 이름도 짓지 않으셨다고 했다. 세상에서 첫울음을 알리고 난지 3달 만에 엄마는 송. 소나무라는 이름을 받았다. 한평생 묵묵하게 그 자리를 지켜내야 했던 운명이었을까? 엄마의 봄은 여전히 추웠다.


<엄마의 여름>

소란하고 치열했다. 3년 만에 갖게 된 아들. 시할머니까지 모시며 효부상도 받았다. 여유 없던 시절에도 '자식을 잘 키워보겠다' 속으로 다짐하며, 육아를 했다. 그러면서도 밤에는 유아교육을 공부하며 꿈을 놓지 않았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흘렸던 건 땀만은 아니었을 엄마의 여름은 열정이다.


<엄마의 가을>

두 아들은 자기 앞가림을 한다. 삶의 여유라는 게 갑자기 찾아왔다. 주변을 돌아보니 '뭐가 남았나'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시원한 바람은 덥다는 핑계로 미뤄두던 것들을 시작하라고 등을 밀어준다. 엄마는 더운 여름에 키웠던 유아교육의 꿈을 시작했다. 남들은 유치원 원장을 할 나이에 가정 어린이집에서 두 살짜리를 돌본다.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아이의 이름을 불러준다고 한다. 또 한마디를 덧붙인다고 한다. '소중한' 누구야라고.


차가운 봄은 엄마에게 사랑의 중요함과 존재의 가치를 알려주었다. 열정의 여름은 '가을의 여유'라는 선물을 가져왔다. 아름다운 하늘, 좋은 음악이 더 가까워지는 이 가을에, 인생의 가을을 살고 있는 엄마와 차 한 잔 하고 싶다. '그동안 수고하셨다고... 엄마의 겨울은 따뜻할 거라고...' 안아드리면 엄마의 주변에 차 향기와 따뜻한 온기가 좀 더 오래 머물겠지? <끝>






나는 A4용지를 가득 채우고,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눈 부시게 쨍하게 비추는 햇볕 때문에 눈을 찡그렸다. 그날 유독 하늘은 더 높아 보였다. 잘 보고 왔냐는 엄마에게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마음이 답답해졌다.




그 해 가을 나는 500:1의 경쟁률을 뚫고 홍보팀에 입사했다. 훗날 나의 보고서를 하나하나 잘근잘근 씹어가며 무안을 주던 임원 아저씨도 그때의 내 글을 몹시 좋아했다. 




그 글은 나에게 부적 같았다. 관두고 싶을 때마다, 모욕을 느낄 때마다, 가슴에 품은 사직서처럼 꺼내서 읽어보았다. 글을 읽을 때마다 유독 높아 보였던 하늘과 쨍했던 햇볕 아래 한숨 쉬던 내가 떠오른다. 그리고 항상 내가 당신에 자랑이라고 말하는 엄마가 떠오른다.




엄마의 겨울이 따뜻하기를 기도하는 밤이다.

비가 자주 내리는 이번 겨울도.

엄마가 마주할 인생의 겨울도.

작가의 이전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수제비 레시피를 잃어버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