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티팝 들여다 보기 1
‘재발견’이라는 단어는 익숙한 설레임을 지닌 언제나 기대감을 주는 단어 중 하나이다. 최근 데뷔 10년 차의 브레이브 걸즈의 '롤린'이라는 곡이 역주행 행진을 하고 있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이 그룹의 또 다른 곡 중의 하나가 '운전만 해'라는 시티팝 풍의 향취를 지닌 곡이다. 처음 시티팝이라는 용어를 접하고 시티팝이 뭐길래? 하는 질문을 해봤던 사람들이 제법 있었을 것이다. 역주행을 하고 있는 것은 무명의 걸그룹뿐만은 아니다. 철 지난 곡들, 지난 스타일, 잊혀진 인물들에 대한 재조명이 어떤 알고리즘 플랫폼에 얹혀 수없이 재조명되고 대중의 열광을 이끌어 내고 있다. 그런데 사실상 따지고 보면 복고라는 패션 아이템은 수십 년 전부터 이어져 왔던 소위 먹히는 트렌드이다. 그렇지만 시티팝의 부활은 아무래도 최근에 주목받고 있는 심상치 않은 재발견이기도 한 것 같고, 그 유니크함에는 어떤 흐름들이 숨겨져 있을까?
한국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시티팝을 전면에 내세우는 가수는 아마 윤종신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몇 년 전부터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서 오르락 내리던 70년대 일본 가수들의 곡들을 접하면서 상당히 고무적인 느낌을 가졌던 것 같고, 원래 다소 지니고 있던 일본풍의 가요 느낌을 이를 통해 음악적으로도 업그레이드해낸 동기부여로 삼았던 것 같다. 단순한 복고 취향에 음악적 기반을 제대로 장착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한국에도 이러한 시티팝 취향의 가요들이 제법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가? 최근 KBS에서 동아기획 사단의 음악들을 재조명하는 프로그램이 방영된 것만 봐도 이제는 이런 형식을 갖춘 시티팝이 무시할 수 없는 대중적 수요를 지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동안 이들 음악은 TV에서는 일체 소개되지 않았고 마니아들 사이에서만 퍼져 나갔었다. 낯선 사람들 편 참조)
우리는 기억을 지니고 있다. 어린 시절 듣던 음악, 공간, 음식 등을 떠올리며 또한 현재를 살고 있다. 우리의 문화 환경만큼 빨리 변하고 빨리 적응하는 대중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런데 우리가 떠올리는 기억들은 특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문화에 대한 기억들이다. 문화는 속성상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질 수는 없다. 우리의 어린 시절과 순수하게 세상을 바라보았던 시기의 추억들을 소환해야 되는 것이다. 이 향수를 따라 우리는 스스로의 시선을 회복하게 된다. 그러니 복고라는 흐름이 지니는 어떤 자연스러운 열망은 퇴행도 아니고 복제도 아닌, 보편적인 마음이 지닌 내면적인 여행과도 같은 것이다.
현재의 문화는 어떤가? 대규모의 자본과 기획력으로 무장한 메이저 기획사들이 보다 빠르고 보다 자극적인 트렌드로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다. 글로벌한 트렌드까지 주도하고 있을 정도이니 이러한 사운드나 패션을 거부할 별다른 이유를 찾기는 어려울 지경이다. 이러한 스타일들은 우리의 감각과 정체성을 주도하다 못해 장악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이런 주류적인 기획적 흐름 자체가 나쁘다고만 할 일은 아니다. 다만 우리의 감각을 우리가 스스로 자발적으로 취사선택한 것인가? 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시티팝은 80년대 초반의 어떤 일본식의 복고적인 재즈 팝-이라는 하나의 정형화된 음악 스타일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시티팝은 어쩌면 따분하고 특별할 것 없는 우리의 일상과 더욱 닿아 있다. 시티팝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필리 소울, 레어 소울이나 가스펄 등의 음악들은 이름 없는 무명의 흑인 연주자들처럼, 생계를 위해 평생을 연마한 연주의 기량 없이 나오기는 만만치 않은 음악들이다. 유별나게 특별나게 들리지 않으면서 다소 평이하고 어렵지 않게 들린다. 그렇지만 실제로 구현하기에는 쉽지 않다. 어쩌면 우리의 하루하루 고단하게 지탱하며 유지하고 있는 나의 일상과 삶에 맞닿은 균형감각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70, 80년대 일본 시티팝이나 소울 훵크 음악을 좋은 오디오로 한번 들어
보면 정말 이 정도의 퀄리티를 지니고 있었나 하며 대부분 깜짝 놀란다.
디지털이 해방시킨 문화의 선형적 시간 파괴의 결과는 놀랍다.
우리는 비로소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문화에 대해 눈을 뜨게 된 것이 아닐까? 한때 글깨나 깨우쳤다고 하는 고학력의 비평하는 사람들이나 TV에서 가치 있다고 하는 것들, 소위 문화권력들이 필터링했던 문화들이 차단했던 우리의 진짜 기억들이 낡은 8mm 필름에서 처럼 되살아 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디지털 플랫폼 덕택에 낡은 과거와 새로운 트렌드들이 한꺼번에 공존할 수 있는 시절로 세상이 변해간다. 무조건 새로워져야 한다는 패션 유행도 이제는 한물간 문화 강박일 뿐이라는 것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아날로그 기계를 통해 어렵게 연주되고 편곡되고 믹싱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탄생되는 다소 낡은 형식의 수고스러움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다. 디지털의 프로세스와 아날로그라는 시간과 감성이 만나 어떤 삶의 향수를 진정으로 어루만져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 시기의 음악은 본질적으로 음악적이다. 최근 바이닐 (음반)에 관한 재조명은 이러한 본질적 수고스러움에 관한 관심이 표출된 것일 수 있다. 오래된 것이 반드시 낡은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에 대한 진정한 발견을 다시금 일깨워 주는 매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조심스럽지만, 문화가 일방향적으로 주어질 때에 (담론에 의한) 필터링 기제가 강력하게 작동할 수 있다. 하지만 내적 자발성이 전제 된다면 음악이든 문화든 공동체의 다양성 만큼의 스펙트럼이 주어진다. 한편 넓어진 만큼이나 더 정교하고 자연스러운 숲을 닮아 간다. 그것이 생명력과 자발적인 내면이 지니는 힘일 것이다.
시티팝은 진보, 혁신, 문화 트렌드, 메이저 기획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필터링에서 이탈해서, 반대로 작은 어떠한 내적인 기억들을 어루만져 준다. 굳이 의미부여를 해야 할 필요도 없다. 햇살이 내리쬐는 마당이 있었던 나의 어린 시절 마루가 생각이 난다. 그 마루에서의 낮잠은 언제나 나에게 커다란 회복을 선사했다. 이제 더 이상 마루가 있던 주택에서 살기는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당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그런 취향의 음악들은 나의 내면적인 정원의 일부가 되고 있다. 그런 것이다. 주도면밀한 기획들과 마케팅 트렌드가, 혹은 거대한 담론들이 우리를 장악한다고 해도, 우리 내면의 정원에서 아름다운 질서를 키우기 위해 정원을 거니는 행위는 한 여름 낮잠처럼 우리를 지혜롭게 일깨울 것이다. 어쩌면 시티팝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손때 묻은 음반들을 어루만지듯 우리의 정체성을 ‘재발견’하는 것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