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욱 작가의 조각
와 석조다 ! 그렇다 무려 돌조각이다. 미술계는 작가 ‘정희욱’이라는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방정아 작가가 운영한다고 하는 부산의 조그만 전시공간 제이작업실(동구 증산동로 17) 을 처음 방문해서 정희욱 작가의 개인전을 만나게 되었다. 현대미술을 무엇이라고 정의하기 이전에 고요하면서도 한 사람의 깊은 시간이 담긴 미술품을 별다른 설명없이 마주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을 만든 작가의 이름을 기억해 둘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고요히 침묵하는 돌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 안에 응축된 한 예술가의 깊고 더딘 시간 속으로 기꺼이 걸어 들어가는 일 뿐이다.
얼굴들과 표정들. 어쩐지 이 얼굴들은 굉장히 친숙하다. 아닌게 아니라 늘상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치는 가장 한국적인 조형감각을 지닌 표정들이라 그런 것이 아닐까? 굳이 전통 미술에서 찾자면 우리의 얼굴을 지닌 반가사유상. 바로 가장 한국적 얼굴을 표현해 내었던, 그러면서도 품위를 갖춘 명상과 초월적 차원을 보여 주었던 그런 종류의 표정들 말이다. 그의 작품 속 얼굴들은 강한 희로애락의 표정을 드러내는 대신, 모든 감정을 안으로 갈무리하는 듯 깊은 명상에 잠겨 있다. 반쯤 감긴 눈,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입가는 외부 세계를 향한 직접적인 반응을 차단하고, 끝없는 내면으로의 침잠을 유도한다.
바닥에 옆으로 누운 얼굴들, 탑처럼 쌓은 조형적 결합들, 배경이 되는 평평한 색과 무늬의 회화들. 작위적이지 않게 자연스럽고 아기자기한 구성적인 요소가 흥미로운 호기심까지 불러 일으킨다. 그건 오랜 풍파에 서서히 깎여나간 듯 무심한 듯 존재론적으로 당위성을 가지는 종류의 표현들 이다. 작가 개인의, 아마도 오랫동안 작가로서의 깎여져 다듬어 온 스스로의 삶과 그 안에 다져온 의지는 침묵하는 돌의 육중함 속에서 충분한 권위를 가진다. 미약하지만 쉽지 않은 종류의 작가적인 집중들은 굳이 미술계라는 조건이 아닌 삶의 상황에서도 존경어린 시선으로 바라볼만 한 작품들의 표정 안으로 스며든다. 돌의 몸체에서 피어오르듯 뻗어 나가는 가느다란 철사 구조물이나 허공에 부유하는 듯한 가벼운 마스크는 육중한 물질성을 벗어나려는 정신의 자유로움으로도 느껴진다. 스치는 듯 배여 있는 추상표현주의의 뉘앙스나 낙서화 같은 표면의 흔적들이 현대성이 지닌 엷은 웃음기를 떠올리게 한다.
추상과 구상, 전통과 현대의 이분법적인 제도화된 영역 구분을 훌적 뛰어넘는 그의 명상적 표정과 마스크들을 보고 있자니 먼 과거의 어떤 기원으로 부터 출발한 영원의 내면, 또는 토착화된 우리의 공간적 배경을 함께 어루만져 주는 깊은 울림의 시간을 만나게 된다. 몇가지 미사여구로 이 작업들을 단정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무거운 돌과 재료와 씨름하며 그의 삶과 작가로서의 여정 속에서 충분히 천착해 내었던 그 투쟁들은 우리가 지니고 있던, 그 공동의 기억을 함께 불러냄으로써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정희욱이라는 이름을 다시 한번 기억하든지. 갖은 표정과 육체적 몸짓 속에서 주목받아야 하는 예술이 처한 상황들 속에서, 그것이야 말로 우연하게 작가나 우리에게 남겨준 이런 미술적인 감동에 대한 최소한의 응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부산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조소를 전공하며 단단한 기초를 다진 정희욱은 평생에 걸쳐 '돌'이라는 재료를 통해 인간의 근원적 모습을 탐구해 온 중견 조각가이다. 그는 대구 봉산문화회관, 서울 KOSA 스페이스를 비롯해 자신의 기반이 되는 부산의 여러 갤러리에서 꾸준히 개인전을 열고 국내외 주요 아트페어에 참여하며,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심화시켜 온 작가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 세계는 돌이라는 원초적 재료의 물성(物性)과 그 안에 담긴 정신성의 탐구로 요약된다. 작가는 화강암이나 오석 같은 재료와 직접 씨름하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단순한 물질을 한 개인의 시간과 철학이 깃든 존재로 승화시키고 있다. 나아가 정희욱 작가는 완성된 형태를 의도적으로 해체하고 그 파편을 미니멀한 회화와 함께 공간에 재구성하는 등, 끊임없이 자신의 예술적 경계를 확장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물질과 정신, 전통과 현대를 자유로이 오가며, 조각이라는 장르를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사유와 울림을 전하는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