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추억이 우리의 추억이 되도록
태풍이 가까워졌는지 밤새 비가 세차게 왔다. 아침이 되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게 개인 하늘이다.
지금을 놓칠 수 없지!
짝꿍이 닳도록 말한 비 개인 후의 물영아리 오름을 오를 때다.
벌써 열두 번도 더 (아니 백번쯤) 짝꿍의 물영아리 이야기를 들었다. 비가 개인 다음날 물이 고인 정상의 습지를 보고 와야 한다고 했다.
그것 외에도 한라산을 오르고 싶은 목표도 있어서 (나 말고 짝꿍의 목표) 우리는 새롭게 등산화도 장만했다.
사실 딱히 내키지는 않지만, 한 번은 가야 끝날 것 같았다.
너의 추억이 아니라 우리의 추억이 된다면 이 끝없는 도돌이표의 이야기도 마침표가 찍히겠지.
여유롭게 말이 걷고 있는 들판에 도착하니 비가 슬며시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눈치게임에 실패한 것일까. 이대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을 놓치지 않기로 했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고 올라, 정상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미 쫄딱 젖은 생쥐꼴이 되었고, 투닥거리느라 기운을 다 써서 기진맥진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할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이걸 그렇게 보여주고 싶었어? 하고 내가 물었더니. 헐떡거리며 숨 쉬는 박자로 그가 그렇다고 했다. (짝꿍의 체력도 별로네)
이제 너의 추억이 우리의 추억이 되었다.
그것을 말해주는 풍경을 천천히 바라보다가 하산했다.
배가 고파서 근처 브런치 가게를 찾았다. 빵이랑 소세지랑 계란이랑 풀을 아그작 거리면서 힘차게 먹고 싶었다.
하지만 태풍의 영향으로 야채 수급이 불가능해져서 브런치 세트는 불가능하다는 답을 듣고 시무룩해지고야 말았다.
거의 우기다시피 해서 단품들의 모임으로 플레이트 한 그릇을 완성!
운동 후에 밥은 정말 해피한 것이로군요.
신발도 운동복도 생긴 김에 천천히 이런 운동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제주는 태풍이 코 앞이고, 서울에서의 우리는 바쁘기만 합니다.
너의 고집으로 오전을 채웠다면!
오후는 나의 고집이다!
벼르고 벼르었던 김보희 작가님의 전시를 봐야 한다.
저지리에 있는 현대미술관에서 9월 30일까지 진행되는 전시는 제주에 오기도 전부터 기대했다.
나는 김보희 작가님의 제주 풍경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뜬금 고백)
짝꿍에게도 이 사랑스러운 것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어제의 김영갑이 제주의 과거를 렌즈에 담았다면, 그다음의 시간들은 김보희 작가님이 캔버스에 담고 있어!
하면서 불같은 설명을 곁들였다.
다행히 내가 좋아하는 제주의 큰 화면들을 그도 좋아해 주었다.
서울 전시에서는 품절이라 구할 수 없었던 도록을 사고, 포스터를 받았다.
제주 전시에서는 김보희 작가의 다양한 시도들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과일과 열매들의 쓰리디 작업도 좋았고,
캔버스를 공간 위에 영상으로 구현시켜 둔 미디어 전시관도 재미있었다.
9월의 제주를 찾는다면 꼭! 들러보시기를.
우리는 언젠가 꼭 김보희 작가님의 작품을 집 안에 걸 수 있기를 기원했다.
열심히 일하고 작품이 잘 어울리는 공간, 그리고 작품을 가질 수 있기를.
좋은 작품이 있는 공간에서 몸도 마음도 머물고 싶다.
그런 집을 함께 만들어가자.
돌아오는 길엔 중문 근처에서 피맥을 즐겼다. 제주 지인이 알려준 맛집이다.
아, 역시 피자엔 맥주!
시원한 맛이 정말 좋고, 바로 붙어있는 옆의 가게는 와인을 팔고 있다.
맥주로 할지 와인으로 할지 고민될 때 일단 여기 앞에 와서 서 있으면 그것 만으로도 좋은 선택이 될 것 같은 곳.
중문은 관광단지의 느낌이 강해서 방문을 피하게 되는 장소인데 이런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다니, 이번 여행은 참 좋다.
배가 너무 불러서 커피를 한잔 하면서 내리기로 했는데,
우리가 찾은 곳엔 커피 자부심이 가득한 직원들이 있는 곳이었다.
디테일하게 원두 설명을 곁들이고, 서로가 주문한 커피를 맛볼 수 있게 작은 잔도 챙겨주셨다.
커피를 가지고 온 직원은 커피를 맛보는 우리에게 더 디테일한 커피 설명도 잊지 않았다.
부드럽고 다채로운 맛이 느껴지는 커피를 해가 지는 풍경과 함께 즐겼다.
사실 오늘은 도록을 사면서 화투패를 하나 집어왔다. 제주의 풍경이 담긴 화투 패다.
나는 서울에서 짝꿍에게 화투를 배우다가 왔는데, 서로의 심부름을 시키거나 하는 용도로 사용하려고 배웠다.
제주에서는 돈을 걸고 본격 화투를 쳤는데, 나는 늘 지고 만다.
결혼이라는 게임도 늘 지고 이기는 무언가를 반복하겠지.
오늘의 나는 물영아리 오름에 져주었고, 김보희 작가의 전시에서 이겼다.
이정도로 비등비등하게 게임을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