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민석 Jun 28. 2016

황금 파도
13화

최민석




정치는 자원의 권위적 배분이다” 

데이비드 이스턴(1917-2014)




#13



탁자를 내리친 한강맥주 회장은 영국산 탁자 위에 놓인 벨을 ‘삐’ 눌렀다. 그러자, 벨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머리를 정갈히 빗어 넘긴 남자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회장님!


마치 사단장이 하급 군인을 불렀을 때처럼, 남자는 힘을 줘 대답했다. 


김 실장


회장님


남자는 말끝마다 ‘네. 회장님’을 관등성명처럼 붙였다. 회장은 김 실장의 60년대 청와대식 충성에 노기가 물러졌는지,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장기혁이란 자식 말이야어떤 놈이야?


원래 미산 인프라 코어 직원이었습니다


그래?! 


회장은 한때 자신의 하수인이라는 생각에, 절반의 우월감, 그리고 절반의 배신감, 그리고 전반에 걸친 당혹감으로 반문했다. 


그런데왜 저러는 거야저 자식


저번에 말 많았던 신입사원 희망퇴직자들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 끼어 있었어?


회장은 별생각 없이 날린 부메랑이 갑자기 얼굴로 날아오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입사 1년 차에 희망퇴직 대상자가 됐습니다그런데


그런데?!


문제가 좀 있었습니다


회장은 성가신 표정으로 탁자 위에 놓인 시가 상자를 열어, 시가 끝을 커터로 싹둑 잘랐다. 그리고 시가에 불을 붙이며 되물었다. 


노조라도 했어?


그게 아니라.


김 실장은 회장의 눈치를 살피며 뜸을 들이다 다시 말을 이었다. 


실은 희망퇴직을 신청하지 않겠다고 해서부서에서 자리 배치를 좀 다르게 했나 봅니다


어떻게


회장의 일그러진 얼굴을 시가 연기가 안개처럼 뒤덮었다. 


하루 종일 벽만 보고 근무하게 했답니다.


그러자 회장이 태연하게 연기를 내뿜으며 반문했다. 


그럴 수도 있잖아?


이에 김 실장이 회장에게 어렵사리 대답을 했다. 


그리고아무 일도 주지 않았답니다


그렇다. 기혁은 미산그룹에서 제출하라고 한 희망퇴직 신청서를 내지 않아, 하루 종일 벽만 보고 아무 일도 없이 지내야했다. 화장실 가는 시간도 제한을 받았다. 그리고 그 후 일주일은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태만 경위서를 써야 했다. 회장은 실장의 이야기를 듣더니, 자신도 할 말이 없는지 흰소리를 해댔다. 


신입사원한테 휴가를 줬구만요즘엔 돈 내고 절에 가서 수행 체험도 하는데돈 받으면서 수행하면 좋은 거 아니야?


자신도 멋쩍은지 껄껄껄 웃어대는 회장의 입에선 시가 연기가 계속 뿜어져 나오고, 얼굴은 인상을 쓰다가 웃은지라 누가 보더라도 그로테스크하게 보였다. 


회장은 한동안 혼자서 고개를 젖혀가며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치고 시가를 비벼 끄며 날카롭게 물었다. 


그래서 뭐챙겨 먹으려고 수작부리는 거 아냐김 실장선물 좀 쌌어


김 실장은 두 손을 다리에 가지런히 붙인 채 대답했다. 


안 그래도 회장님이 궁금해하실 것 같아서같이 근무했던 상사를 불러놓았습니다


성미 급한 보스 밑에서 이십 년 가까이 일한 수하의 처사에, 회장은 반색했다. 


그래들어오라 해


김 실장이 회장실의 문을 열자, 문 바로 앞에 이미 한 남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중년 남자의 어깨에는 힘이 빠져 있었고, 그가 입은 양복 역시 대기업 직원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맵시가 나지 않아 보였다. 남자가 열린 회장실 문으로 조심스레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회장과 눈이 마주치자 허리를 잔뜩 숙여 인사를 했다. 이때, 회장이 다짜고짜 물었다. 


장기혁이얼마주면 되겠어?


회장의 말이 남자의 숙인 허리 위를 지나가는 듯했다. 남자는 그 말이 지나갈 쯤의 시간이 흐르자 허리를 다시 펴고, 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미산 인프라 재무과 정차식 부장입니다


회장은 인사를 하건 말건, 아랑곳 않고 다시 물었다. 


장기혁이얼마주면 헛소리 안 하겠냐고?


그러자 마침내 남자가 대답했다. 


아마받지 않을 겁니다





한 평생 동안 권력과 면죄부와 환심과 심지어 사랑까지도 돈으로 사온 회장은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뭐야?! 안 받아?


회장은 어이가 없다는 반문하더니, 혼잣말을 했다. 


돈 싫어하는 새끼가 어딨어?!


그는 정 부장의 대답에 화가 났는지, 아니면 세상에 자기가 살아온 방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 있다는 게 참을 수 없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로 서랍을 와락 열어젖혔다. 그 안에는 누런 현금 다발이 가득했다. 


말이 안 돼말이돈 싫어하는 새끼가 있다니


회장은 손에 잡히는 대로 다발을 쥐고, 남자에게 던졌다. 현금 다발이 남자의 몸에 맞고 바닥에 툭, 툭 떨어졌다. 


한 뭉치에 오백이야줍고 싶을 만큼 주워너도 돈 벌러 여기 온 거 아냐?! ?! 주우란 말이야


그러자, 남자는 자신의 발 앞에 떨어진 돈뭉치를 묵묵히 보다가, 허리를 숙인 채 쓰레기를 줍는 미화원처럼 특유의 생기 없는 동작으로 주섬주섬 주웠다. 주은 돈을 어쩔 줄 몰라 김 실장 쪽을 흘끔거렸다. 남자는 마치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야구팀의 배터리처럼 김 실장의 사인을 기다렸다. 김 실장이 눈짓을 주자, 남자는 씩씩 거리는 회장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한 뒤, 조용히 회장실을 나섰다. 걸어 나가는 그의 구두굽이 잔뜩 닳아 있었다. 




                                                                                 *



한편, 한때 기혁에게 ‘서양 정치사’ 강의를 들었던 백화점 문화센터 수강생 ‘에르메스’는 목동의 80평대 아파트에서 기혁의 TV 토론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그리고 배를 깎던 과도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여보저게 가능해요?


이번엔 남편이 배를 우물우물 씹으며 대답했다. 


뭐 말이야?


국회의원이 맥주의 제조법을 제한하고대기업에서 유보금도 걷겠다는 거 말이에요?


남편은 TV 리모컨을 쥔 손으로 다른 채널로 돌리려다가, 잠시 생각했다. 


일단자유시장 경제체제에서 국가가 기업의 제조법까지 제한하는 건 국민 건강이나 국가적 차원의 중대사가 아니고서는 어려울 것 같은데권리 침해에 해당될 것 같긴 한데… 나도 좀 찾아봐야 알겠어나라고 해서 다 아는 건 아니잖아


평소에는 내 앞에서 그렇게 젠 체를 해대더니


에르메스의 타박에 남편은 무안한지, 화제를 돌렸다. 


맥주 이야기만 계속 들으니까맥주 생각나네


남편은 부인과 눈을 못 마주치고, 아예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 냉장고에 맥주 없어?


에르메스가 남편의 입에 배를 하나 쑤셔 넣으며 답했다. 


어여 잠이나 자요맨날 지각하는 양반이


에르메스는 입안에 든 배를 어쩔 수 없이 씹는 남편을 보며 한심하다는 듯이 첨언했다. 


내일 또 재동까지 어떻게 출근하려고요?!




                                                                                 *



중앙 방송 현관을 막 나선 기혁은 어리둥절한 기운에 휩싸였다. 


도대체 내가 또 무슨 짓을 한 거지?!’


기혁은 다시는 절대 TV 토론에 나오지 않겠다고 다짐에 또 다짐을 했다. 그리고 생방송 때 꺼놓았던 개인 휴대 전화기를 켰다. 초기화면이 뜨자, 곧장 빨간색의 부재중 전화 신호가 떴다. 전화기 화면을 빨간색으로 가득 채운 이름은 바로 유정민이었다. 기혁이 정민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찍어 전화를 걸자, 신호음이 가자마자 곧장 정민의 성난 목소리가 들렸다. 


장기혁이제정신이야?


이때껏 하대를 하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윽박지른 적이 없었던 정민이다. 그렇기에 기혁은 놀라서 이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너 당을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한 거야도대체무슨 생각이야?


죄송합니다


기혁은 자신도 모르게, 일단 사과부터 하고 말았다. 


뭐가 죄송한 거야?


정민이 따지듯 묻자, 기혁은 ‘정말 뭐가 죄송한 거지?’라는 표정으로 중앙 방송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있게 됐다. 


뭐가 죄송한 거냐고?!


딱히 기혁의 대답을 바란 건 아니지만, 정민 역시 화가 나서 기혁을 재촉하고 말았다. 


기혁은 한 손에 휴대 전화를 들고 서 있다가, 도대체 뭐가 미안해야 할 건가 생각했다. 생각을 하는 사이 휴대전화를 쥔 그의 오른손이 서서히 내려왔다. 그러자, 전화기 스피커에서는 정민의 타박이 계속 새어 나왔다. 


너 듣고 있어장기혁이이게 얼마나 큰일인지 알아역풍 맞으면 당 전체가 깨진다고니가 대통령이야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기혁은 마침내 멍했던 얼굴에서,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 표정이 되어 축 처져 있던 팔을 다시 귓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오랫동안 기다린 정민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래자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이제 적폐를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았거든요


전화를 끊고, 고개를 올려보니 밤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하지만, 그 구름 뒤에도 달은 빛나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황금 파도 12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