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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룬 Oct 26. 2020

내 리듬대로 움직이러

강릉 바다 여행

너무 행복했다


수험생활 내내 나를 괴롭히던 잡념과 쓸데없는 생각들을 모두 강릉 바다에 던져버리고 현재에 충실한 나, 내가 누군지 알겠는 나를 다시 찾은 여행. 그렇기에 오래 기억해야 해서 기록해놓으려 한다.



마지막으로 ktx를 탔던 게 작년 상반기였던 것 같다. 이렇게 쾌적하면서 따스한 빛이 들어오진 않았던 거 같은데... 적당히 사람이 있는 오전 ktx 안에서 Kings of Convenience의 노래를 들으면서 갔다. 저때의 내 기분과 100% 일치해서 완벽하단 생각이 들었다.



전날 밀린 잠을 꾸벅꾸벅 졸면서 보충하다가 정차역에서 눈을 떴을 때, 저런 풍경이 보였다. 날은 맑고 가을 단풍 덕에 창 밖은 색소를 뿌린 것처럼 예쁘고, 새 출발을 축복해주는 것 같았던 풍경.



날씨 운이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는데, 그런 징크스도 깨부숴주었다.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잘 하지 않는 편인데, 이날만큼은 가자마자 충동이 이성을 이겨버린다. 느끼해서 다 먹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순간 끌렸던 빵을 먹고 차가운 몸 때문에 늘 자제했던 아이스커피를 시켜 먹는다. 하고 싶은 대로. 일상에서 너무 절제가 습관이 돼 있었던 것 같다. 소비뿐만 아니라 그냥 일상에서 말이다. 나 같은 유형이야말로 혼행이 정말 필요한데...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다.



내가 엄청나게 사랑하는 활자가 최근 들어 잘 읽히지 않았다. 특히 원래 관심 있던 작가나 분야의 책들을 봤을 때 예전처럼 몰입되는 느낌이 아니라 이유가 뭘까 고민이 있었다. 그러다 조금씩 알아가야겠다고 맘먹었던 분야를 설명한 책을 발견했는데, 따-따-따- 하는 재미없는 설명이 아닌, 흡인력 있는 설명의 좋은 책이 있어 술술 읽다 나왔다.



책방에 더 있고 싶었지만 바다를 보러 가야 해서 적당한 때에 나와 밥을 먹었다. 평소 같았으면 밥을 이 애매한 시간에 먹을지 말지의 여부나 무얼 먹을지에 대해 옆에 있는 사람의 의견을 들었을 테지만, 그럴 필요 없이 오로지 나 자신의 상태와 리듬에 맞출 수 있어 좋았다. 칼국수는 내 입맛엔 면발이 조금 퍼졌지만 맛있었고, 양 옆에서 조잘조잘 이야기하며 먹는 일행들 사이에 혼자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 조금의 외로움을 느꼈다.



마침 버스가 와 바로 타고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해변으로 갔다. 버스가 다음, 그다음 정류장에 설 때마다 바다 냄새가 가까워졌다. 신기했다. 내리자마자 속으로, 아니 어쩌면 육성으로 비명을 질렀다. 너무 좋아서. 푸른 바다랑 하늘, 콰아아아- 하는 시원한 파도 소리, 서울 어디에서도 못 맡는 바다만이 내뿜는 냄새가 완벽했다. 파도가 철썩철썩 치는 저 광경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 머리를 맑게 해 주었다.



여기에서 카페에 갈 생각은 없었는데 핸드폰 배터리를 충전하러 어쩔 수 없이 들렀다. 하지만 주인분도 친절하셨고 즉흥적으로 계획을 변경하고 행동하는 일이 좋았다. 폰을 충전하면서 그동안 폰에 써놓았던 부끄러운 일기들을 전부 지워버렸다. 마음이 참 깨끗해졌다. 지난 몇 개월 간 누구도 나를 괴롭히지 않았는데 나 혼자서 내 정신을 학대했던 것 같다. 믿는 대로 보지 말고 보이는 대로 믿자.



해질 때쯤 바다에서 나와 낮에 점찍어두었던 가게에 들렀다. 역시나 스쳐 지나갈 때 느꼈던 것처럼 내 취향의 소품들이 가득했다. 눈을 평소보다 두 배 정도 크게 뜨고 이 아기자기하고 반짝반짝한 물건들을 소중히 바구니에 담았다. 조금 과하다 싶은 물건들은 자제하고, 꼭 필요하고 자주 쓸 것 같은 아이들만 데려왔다. 이 물건들을 일상에서 보면 첫 혼자 여행지였던 강릉 바다가 생각날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저녁에는 땡기는 건 없었지만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아 시장으로 갔다. 강릉에 오기 며칠 전부터 아바이 순대를 먹겠다고 벼르고 있었다.(사실 속초에 갔어야 하는데..) 만약 먹는 환경이 여의치 않으면 집에 포장해 가 먹을 생각이었다. 마지막 계획을 세우던 중 깜짝 놀랄만한 사람을 만났다. 닭꼬치와 아바이 순대와 시원해서 속이 뻥 뚫리는 맥주를 함께 먹었다.



서점에서의 경험을 꼭 공유하고 싶었는데 그 바람이 바로 실현되어서 놀라고 또 좋았다.



마지막까지 완전한 혼.행은 아니었지만 배고프고 어두운 채로 강릉의 밤거리를 혼자 걸었을 나를 떠올려보면 외롭고 쓸쓸했을 것 같다. 나를 외롭게 방치해두지 않는 사람의 소중함. 불쑥 찾아오는 예민함에 혼자 있겠다며 한 뼘 밀어내도 두 걸음 더 다가온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면 바깥에서 라이트 비추며 기다리는 사람.


다시 완전에 가까운 모습이 된 자존감으로 주변 사람에게도 좋은 에너지로 대해야지. 이런 기회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음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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