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 그 최초의 기억에 대하여
이 이야기는 죄책감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꽤 감정적인 편이고 저 밑 어딘가에 나쁘고 영악한 면이 있는 보통사람이다. 자라면서 사회성을 배운 덕에 그 바닥을 드러낼 일은 많지 않지만 가끔 화가 났을 때, 나쁜 생각을 하곤 한다. 상처받을만한 소재, 너무 과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비유, 수치심과 비참함을 느낄만한 표현을 골라내고 있는 나를 종종 발견한다. 입속에 칼날을 물고 있는 느낌은 나쁘지 않고, 어떻게든 상처를 주고 싶다는 마음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 덕에 아직까진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는 초등학생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짝꿍과 꽤 친했는데 우리가 친해진 계기는 해리포터였다. 심각한 해리포터 덕후인 우리는 빠르게 친해졌고, 낙서장을 펼쳐 호그와트를 세워 학교를 운영했다. 이렇게 공동의 뭔가를 하다 보니 더 친해졌는데 어느 날 이 친구와 싸웠다.
뭐 때문인지,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는 것은 내가 한 말에 그 남자애가 울었던 것. 엉엉 울면서 뭐라고 외쳤던 것. 너무 슬프게 울어서 눈물 콧물 할 거 없이 바닥에 뚝뚝 떨어졌던 장면이다. ‘이렇게 말하면 상처받겠지’하고 생각해서 내질렀던 것 같은데 진짜로 상처받아서 무너지는 걸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반박하면 더 심한 말을 해서 이겨야지 하고 잔뜩 준비했는데. 당황스러웠다.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친구는 밝게 말을 걸어왔지만 왜인지 친구의 바닥을 본 것 같은 기분에 그 학년이 끝날 때까지 쭉 도망 다녔다. 사람의 마음은 정말 연약하구나 하고 그때 배웠다. 그 이후로는 아무리 싫은 짓을 당해도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은 뱉지 않는다. 사람 하나가 무너지는 모습은 싫어하는 사람이더라도 유쾌하지 않은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 안 좋은 말은 삼켰을 때 마음이 더 편하기도 하고.
이렇게 얘기하니 별거 아닌 기억 같기도 한데 2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에피소드다. 내가 무슨 말을 한 지도 기억이 안 나지만 그때 생각만 하면 울컥한다. 그 친구 표정이 너무 아파 보여서. 그 기억이 선명해서, 미안해서.
한동안 잊고 있다가 오랜만에 해리포터를 다시 보니 떠올랐다. 내가 뭣때문에 이 이야기를 썼는지 모르겠다. 사무치는 이야기를 써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글을 읽어서 일까. 사무치는 일이 고작 초딩때 친구한테 심한 말한 거라니 꽤 잘 살아온 거 같기도 하다. 하지만 댓글로 누군가의 상처받은 유년시절 이야기를 읽을 때면 생각한다. 사실은 나도 가해자일지 모른다는. 뱉어버린 말은 시위를 떠나 다시 내게로 향하기도 한다. 과거의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다.
October 23,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