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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리안 Nov 02. 2023

창덕궁 '후원'에 물그림자 드리우니

 



고요하고 그윽하여 숙연해지고 말았네

숲은 어쩌다 툭툭 소리 내며 술렁이는데

규장각 담장 너머 햇살은, 찬란했다 

사라졌다 하는 사이 그리움 그늘처럼 깊다


후원 한가운데 선한 바람 간간이 불어

산들거리며 나부끼던 느티나무 이파리 

부용지 정자 아래 사뿐히 떨어지니

뜰이 품은 녹색 이끼 세월만큼 푸르러라


못다 한 말 어디 선인들뿐이었으리

하고픈 말 솟을대문 지나 성벽에 깃들어

보고픈 이 쉬이 보기 어려워 눈동자에 담았나

애련정 물 위에 그림자만 무성하네


사랑하는 이여 듣고 싶은 말 있어 별이 뜬다

우러르는 이여 하고 싶은 말 있어 달이 뜬다

높은 이여 낮은 이여 해와 달과 별을 기리니

그때도 하늘은 오늘도 하늘은 묵묵히 푸르도다




# 시작 노트 


선선한 바람이 한차례 불어오자 후원 입구 단풍 든 느티나무잎들이 화르르 황홀하게 흩날린다. 그렇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과 '후원'은 지금 가을이 깊어 간다. 한때 '비원'이라 불렸던 이름처럼 가을빛이 정원 깊숙이 들어와 있다. 비원이 입에 붙어 나는 자주 비원이라 칭하는 창덕궁 '후원'은 예전에는 학생 백일장과 사생 대회 등 각종 행사를 장려했던 장소이다. 지금은 문화재 보존 각성이 점점 높아져 많은 인원의 개방을 권장하지 않고 있다. 


이전의 통제와는 다르게 지금은 후원 곳곳에 장치를 두르고 제한 구역이 많아졌지만 예전에는 시민의 사용을 허용했기에 행사에 참여한 나도 언덕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앉아 숲과 뜰을 내려다보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기억은 왜곡된다지만 그때는 녹음이 더 짙고 숲이 더 깊었던 기억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한 조치에 동조하면서도 숲을 걷는 중 막아 놓은 장소 앞에서는 더 깊은 숲길로 들어가 걷고 싶은 생각이 밀려오기도 한다. 


단풍철에는 영락없이 이른 아침 8시부터 긴 줄이 이어지고 9시에 매표가 시작되는데 현장 구매와 홈페이지 예매가 일찌감치 끝난다는 게 관계자의 말이다. 나의 경우는 운이 좋았던 것인지 어려움 없이 휴대전화 앱에서 예약을 마쳤다. 조선 왕조 시스템을 너무 싫어하는 사람으로서 옛사람들은 넓디넓은 구중궁궐 안에서 걸음도 정숙하게 걸어야 하였으니 바쁘고 성질 급한 사람들은 어찌 살았을까 싶다. 티브이 드라마 '슈룹' 중 중전 역의 배우 김혜수가 바람 잘 날 없이 말썽 부리는 대군들 건사하느라 바삐 뛰며 멋지게 설파하지 않았던가, "국모는 개뿔, 중전은 극한 직업이다!" 


후원 안 '애련지' 주변에 스산한 바람이 자주 분다. 나뭇잎들이 사르륵, 화르르, 쓸쓸한 소리를 내며 물 위로 살포시 내려앉는다. 그 풍경을 지켜보며 비원에 오래 머물렀다. 11월 30일까지는 후원을 개방하니 지금 가 보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되겠다. 오직 후원만을 목적으로 종종 찾았으나 유독 후원만 개방하지 않아 아쉽게 발길을 돌리며 낙선재와 창경궁을 걷다 나온 경험이 있어, 기회가 되었을 때 들러 보기를 권하는 마음이다. 와중에 임금과 신하가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지으며 유유자적 풍류를 즐겼다 전해지는 '옥류천'은 20년 만의 보수 공사를 하고 있어 현재 개방하지 않고 있다. 2024년 초쯤에나 완료될 예정이라고 한다. 옥류천까지 걷지 못하고 돌아온 건 또 서운함으로 남는다. 좋은 계절에 걸맞은 궁궐 '후원'과 만나는 산책의 시간은 도시를 걷는 것과는 또 다른 숙연한 사색의 시간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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