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여행을 계획하며 가장 고민했던 것은 뮤지엄 방문 여부였다. 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등 당대 내로라하는 최고의 뮤지엄들이 모인 곳이니, 각 장소를 하루씩만 잡더라도 3일은 써야했다. (오랑주리는 하루를 다 쓸만큼의 공간은 아니긴 하다) 뮤지엄을 방문할 지 말지를 결정해야 뮤지엄패스권 구입 여부를 정할 수 있었다. 여행은 인생만큼 결정할 게 많은 행위였다.
이번 여행이 오롯이 나 혼자 가는 여행도, 파리에서만 보내는 시간도 아니였기에 친구와 상의 끝에 뮤지엄패스는 포기하기로 했다. 뮤지엄패스권이라는 기회비용이 발생하면, 그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서라도 모든 박물관을 다 가보고 싶을 텐데 그러기엔 시간도, 체력도 부족했다. 그러나 여행에 도착해서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됐다.
우리가 보낼 첫째주 일요일이 파리의 뮤지엄데이, 즉 무료 입장의 날이라는 것이다. 이게 웬, 횡재! 기회 비용에 얽매이지 않고, 고흐의 작품 단 한개라도 보러 오르세미술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앞의 글에서 밝혔듯,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나온 모든 장소를 누벼보고 싶던 나는 친구에게 오랑주리 미술관부터 가길 주장했다. 모네의 수련 연작 앞에서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보고 싶었다. 또 오랑주리의 관람객 줄이 가장 짧아서 전략적으로도 옳은 선택이었다. 오랑주리 미술관 안으로 비치는 채광과 함께 모네의 작품을 보았다면 이제 오랑주리를 빠져나가도 좋았다.
나오는 길에 모네가 1차 세계대전으로 희생당한 젊은이들을 위해 작품을 기증한 사연을 보며 가슴이 따뜻해야 따뜻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건가, 라고 생각했다.
오랑주리를 떠나 오르세 미술관을 향했다. 가는 길에 튈르리 정원의 정취와, 세느 강변 앞에 늠름히 서 있는 오르세의 외관을 느낄 수 있던 것도 걷는 여행의 묘미였다.
오르세 미술관 방문에 대해서 처음엔 회의적인 부분도 있었다. 인상파 그림들이 주이지 않겠느냐 하는 섣부른 판단과 고흐 그림은 한국에서도 많이 보았으니 중요한 것들만 보고 빠르게 나오자는 생각으로 오르세가 두번째 방문 장소가 되었다. 그러나 오르세에는 밀레, 마네 등으로 대표되는 인상파 작품 외에도 로댕의 조각, 뭉크와 고갱의 그림 등 정말 상상 이상의 많은 작품들이 있었다. 인상파 작품에 대한 로망이 크지 않았음에도 실제로 본 인상파 그림 아우라에 매료되어 그 앞을 계속 서성거렸다.
무엇보다 인생 처음으로 마주한 고흐의 자화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름다운 에메랄드 하늘빛으로 채워진 자화상이었는데, 사진에는 그 감동이 다 담아지지 않았다. 늘 귀가 잘린, 우울한, 고흐의 자화상을 보다가 찬란한 배경 속에 앉아있는 고흐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눈빛은 여전히 불안해보이지만) 실제로 이 자화상과 '별이 빛나는 밤에' 등은 모두 고흐가 심각한 우울증을 앓던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그는 "한 사람이 여러 성격의 모습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였는지 불안한 내면은 잊어버릴 정도의 아름답고 황홀한 여러 작품을 남겼다.
그의 자화상을 보며 우리의 뮤지엄데이가 성공적이었음을 직감했다.
오르세에서 고흐의 작품이 뿜어대는 아우라 덕에 시간을 많이 쓴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 입장을 포기해야 했다. 그 뒤로 파리 시내를 돌아다니며 본 삼각 피라미드 모습에만 만족했다. 언젠가 파리에 꼭 다시 올테니, 우리의 선택이 그리 아쉽지 않았다.
루브르 박물관처럼 우리가 포기한 랜드마크가 하나 더 있었는데, 그 곳은 베르사유 궁전이었다. 길지 않은 일주일의 여정 중, 몽생미셸도 가야하고 체코 프라하로 넘어가야하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대신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만큼 찬란한 금빛을 구경할 수 있고, 샤갈의 천장화가 있다는 오페라 가르니에를 다녀왔다. 가장 사랑하는 화가 샤갈의 천장화를 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역시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인생과 여행은 늘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이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 만족, 후회는 오롯이 나 자신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