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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 Feb 23. 2022

우리에겐 우리와 비슷한 형상에 대한 사랑이 필요해

김상혁, 어떤



어떤 사람에겐 나무가 꼭 필요해. 잘 살기 위해서.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며 그 소리를 듣는 일이. 어떤 사람에겐 남의 행복이, 또 남의 고통이 필요해. 어떤 가치 없고 무고한 타인의 죽음이 필요하고. 흔들리는 나무 밑에서 그런 비극을 떠올리며 어쨌든 좀 슬픈 것 같은 순간이 필요해. '어떤 사람은 그냥 걷다가도 죽는대. 사랑하다 죽고. 사랑을 나누다가 기쁨이 넘쳐서 죽고. 산에서 죽고. 바다를 건너다 죽는대.' 어떤 사람에겐 행복이 필요해. 꼭 나무를 보듯 불행이 필요하고. 어쨌든 어떤 믿음, 소망, 관용, 이런저런 이야기가 필요해.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자신, 옆 사람, 어떤 사람, 그것도 아니면 크든 작든 사람을 닮은 그 무엇의 기쁨과 슬픔이. 우리에겐 우리와 비슷한 형상에 대한 사랑이 필요해. 어떤 나쁜 마음이라도. 잘 살기 위해서. 조각난 팔과 다리, 터지고 일그러진 얼굴에 대한 말이 꼭 필요해.


- 김상혁, 어떤




요즘 들어 베프가 외롭다는 말을 자주 한다. '외로워', '왜 남자들은 나를 여자로 안보는걸까?', '진짜 넘 외롭다' 그러더니 열흘 가까이 잠수를 타고 있다. 베프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줄기차게 건네야 했는데... 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베프가 외롭다고 말을 하면 나는 그냥 말문이 막힌다. 알고보면 참 외로운 사람이 '나 외로워'라고 말하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마치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사람이 '나 아파'라고 말했을 때 느낄 법한 기분과 비슷하달까. 아니 외로움이 무슨 중병도 아닌데 오바하지 말라고요? 그건 모르시는 말씀이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은 핵무기도 기후위기도 아니라 바로 외로움이다. 우리는 외로워서 쓸데없이 원수를 만들고, 외로움과 한평생 괴롭게 싸우다가, 외로움에 지쳐서 죽어가는 거다. 만약 외로움이라는 인류 공통의 병이 사라진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나'를 거울처럼 비춰주는 '당신'이라는 존재조차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난 강아지를 키우고 싶어" 또다른 미혼 친구가 내게 말한다. "난 아무래도 반려견이 필요한 거 같아. 잘 살기 위해서라도" 아니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잘 살기 위해서라니. 생각할수록 어려운 말이다. 사람마다 '잘 산다는 것'에 대한 기준이 다르고, '잘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제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죽음이라는 확고한 사실 앞에서 우리 삶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이 시에서는 '잘 살기 위해서' 나무, 남의 행복, 남의 고통, 무고한 타인의 죽음과 좀 슬픈 것 같은 순간들, 행복 등이 차례차례 열거된다. 그중에서 특히 눈길을 사로잡는 건 '이야기'이다. 믿음과 소망, 관용에 대한 이야기와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 그것도 아니라면 사람을 닮은 그 무엇의 기쁨과 슬픔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시인은 이렇게 한다. '우리에겐 우리와 비슷한 형상에 대한 사랑이 필요해'


그래서 태초의 남자는 여자를 원했던 걸까. 그 후예들 역시 여자를 찾고, 여자들은 나만의 아이를 갖고 싶어하고, 아이들은 두 팔 벌려 안을 수 있는 인형을 원하는 것일까? 어떤 나쁜 마음이라도. 잘 살기 위해서. 그런데 인형은 왜 자주 더러워지고, 한쪽 눈알이 떨어져나가 외꾸눈이 되기도 하는 것일까? 그러면 아이는 왜 엉엉 울면서 부모더러 내 인형을 고쳐달라고 떼를 쓰는 걸까? 그리고 아이는 자라나서 더 이상 인형을 찾지 않게 된다. 자신과 어울리는 짝을 만나서 결혼하고, 자신을 꼭 닮은 아이를 낳아서 기른다. 부모의 얼굴처럼 아이의 얼굴도 자주 일그러지고, 아이의 인형에도 꿰매고 기운 흔적이 점차 늘어난다. 그리고 아이는 자라나서 더 이상 인형을 찾지 않게 된다. 이 이야기는 아주 길고 긴 세월 동안 반복되어온 네버엔딩 스토리이다. 결국 우리들은 우리와 비슷한 형상에 대한 사랑을 쫒는 이야기 속에서 살다가, 이야기 속에서 죽는 것일까. 남는 것은 다만 이야기일 뿐... *


예전에는 잃어버린 소중한 물건을 찾아 헤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딱히 무어라 정의 내리기 힘든 '그것'은 잘 살기 위해서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신에 대한 믿음이기도, 사람에 대한 사랑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나는 나를 이해하고 싶은 열망이 컸다. 마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인 것처럼 종종 비참해지곤 했으니까. 요즘 나는 잘 살기 위해서  한 시간 가량의 산책이 필요하다. 맛있는 똠양꿍 요리가 필요하고, 웃기고 재미있게 사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 그렇다. 진정 재미가 필요하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베프에게 다시 톡을 보내야겠다. '언제 시간 되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조금만 더 욕심을 부리자면, 나에겐 잘 살기 위해서 언제라도 친구에게 근사한 밥 한 끼를 사줄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




*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이 시가 수록되어 있는 김상혁의 시집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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