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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기억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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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혜 Jun 06. 2022

태몽


 나는 혼자서 산에 오르고 있었다. 운이 좋으면 떨어진 도토리를 주울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말이다. 완만한 둘레길이었고 바람도 간간이 불어왔다. 눈앞은 온통 초록이었다. 한참을 걷다가 쉬고 싶은 마음에 길이 아닌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 작은 공터가 있었다. 그곳에서... 황금빛 눈을 가진 정체불명의 짐승을 만났다. 그것은 좀처럼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내 주변을 탐색하더니 어느 순간 내 발치까지 와서 누웠다. 나를 바라보지 않고, 마치 보이지 않아도 다 안다는 것처럼 무심하고 스스럼없는 태도였다. 작렬하는 태양빛 같은 갈기를 홀린 듯 바라보는데 짐승이 갑자기 하품을 쩍 했다. 어딘가 불편한 기색으로 연신 하품을 하기에 '배가 고픈 건가', 생각했다. 틀림없이 그럴 거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나도 모르게 배낭을 열면서 말을 건넸다. “뭐라도 먹을래?” 짐승의 얼굴이 살짝 꿈틀거리더니 나를 향해 기울어졌다. 우리는 흡사 눈싸움이라도 벌이듯이 서로를 가만히 주시했다. 짐승의 눈동자에는 날리는 꽃잎 같기도 하고 둥근 금가락지 같기도 한 불이 있었는데 그 불 안에 타들어가는 내가 있었다. 인영(印影)이 재가 되어 풀썩 가라앉는 순간 짐승이 움직였다. 나는 놀라지도 못하고 다만 눈을 꼭 감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른다. 눈을 떴을 땐 짐승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눈 앞에 주먹만 한 황금빛 열매가 놓여있었다. 얼핏 보아선 작은 고무공처럼 보였지만 자몽이나 오렌지처럼 껍질이 단단했다. 특별한 향기는 나지 않았다. 대신 불에 그슬린 듯한 냄새가 언뜻 났는데 바람이 불어와서 그마저 흩어지고 말았다. 아닌 게 아니라 열매는 이상하게 뜨거웠다. 그대로 햇빛 아래서 노랗게 익어가도록 두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열매를 두고 갈 수 없었다. 사라지고 없는 황금빛 눈의 짐승이 어디에선가 몸을 숨기고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은 열매가 나를 쏘아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배낭에서 손수건을 꺼내 재빨리 열매를 감싸 쥐고서 산을 내려왔다. 집에 가까이 왔을 때는 우습게도 다리가 후둘거렸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와서야 겨우 한숨을 돌렸다. 열매를 부엌 찬장 안에 넣어두고 나는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잤다… 눈을 뜨니 어느새 밤이었다. '열매는 어떻게 되었을까?' 부엌으로 가서 찬장을 열어보곤 그만 말문이 막혔다. 작은 공에 불과했던 열매가 제철 수박처럼 거대해져 있었다. 이대로 두면 덩치가 계속 자라나서 찬장을 뚫고 나올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박 만한 열매를 잘게 잘라서 설탕을 듬뿍 넣고 과일청을 만들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그 과일청을 내가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꿈의 내용이나 맥락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태몽과 비슷해서 웃음이 나왔다.



2022.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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