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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스카프 Aug 18. 2021

잠 못 이루는 밤

# Zduša 오두막과 하얀 밤

자그레브를 떠나는 아침 하늘이 파랗다. 오늘은 잠깐 크로아티아를 떠나 슬로베니아 블레드 성을 돌아보고 류블라냐에서 하루를 묵어갈 예정이다. 보통 2시간 30분 정도면 가는 거리니 아침을 크게 서두를 필요는 없다.  우선 국경을 넘으려면 비넷(vignette)이라는 통행권을 구입해야 한다. 비넷은 보통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서로의 지역으로 이동할 때 쓰는 통행권 중 하나로 대부분 국경 근처의 휴게소나 주유소에서 구입할 수 있다. 기대로 설레는 마음을 잠시 누르고 슬로베니아 국경을 향해 달린다. 창문 너머로 어디서 많이 본듯한 차들이 경쾌한 속도를 내며 우리를 앞질러 갔다. 한국을 떠나면 생기는 이상한 애국심이 장난기와 함께 발동한다.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 속에서 국산차 찾기 게임을 하고 있는 우리는 행복한 여행자임에 틀림이 없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그랬다. 평소 쳐다도 보지 않던 너무나도 익숙한 현대와 기아차를 보니 5천 마일을 날아온 크로아티아의 낯설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게임이 한참 무르익어 갈 즘 우리 차는 국경 근처에 도착했다. 그렇다. 우리는 국경에 도착할 때까지 비넷을 구입하지 못했다. 안 되는 영어와 손짓 발짓을 통해 비넷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을 묻는다. 분명 첫번째 주유소라는 말을 들은 것 같긴 한데 주유소 직원이 하는 말은 바람과 같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귓등만 스쳐갔다. 결국 우리의 이웃 네이버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래 이거야.. 그동안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여행했던 수많은 여행자들의 비넷 구입 방법이 쏟아져 나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 쉰 우리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이내 이정표가 두브로니크를 가리키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안 좋은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더니 딱 우리를 두고 생겨난 말 같다. 우리 차는 슬로베니아 반대로 달리고 있었다. 으흐흐흐 그래~ 이런 경험이 자동차 여행의 매력이지!! 애써 여행자의 마음로 돌아가 보았지만 이미 국경을 넘기까지 3시간이 흘렀다.

 

블레드 호수에 도착하니 시계는 벌써 오후 2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도로를 따라 꽤나 멋스러운 레스토랑들이 즐비하다. 우리는 블레드 호수를 마주한 Restavracija Penzion Mlino라는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호수를 배경 삼아 맥주와 간단한 디저트를 즐기고 있는 있는 사람들 사이로 가장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주문했다. 아마도 해산물 모둠 요리인 것 같다. 송어와 도미로 보이는 생선과 민물가재, 튀김 등이 메인으로 나오는데 그 아래로 너무나도 반가운 밥이 숨어 있다. 슬로베니아 사람들도 우리 만큼이나 쌀을 좋아하는 걸까? 

블레드 호수 해산물 모둠 요리

짧고 굵은 식사시간을 마치자 제법 블레드 성이 시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흑기사'에서 보았던 바로 그 성이다. 화창한 날씨 덕에 신비로운 고성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또렷한 성곽의 모습이 호수처럼 맑은 하늘과 어우러져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 성의 이름인 블레드(Bledu)는 독일의 헨리 2세가 1004년에 브릭센의 알부인 주교에게 준 땅으로 지금까지 슬로베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로 자리 잡고 있다. 

블레드 성에서 바라본 시가지


슬로베니아의 블레드 성

절벽 위의 성에서 마시는 커피는 풍광을 힘입어 진하고 그윽하다. 블레드 성을 나와 류블냐나 구도시에 도착하니 어둠이 내려앉았다. 늦은 밤까지 도시 구경을 위해 가까운 도심 중간에 숙소를 예약했다. 슬로베니아는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도 치안이 안전하기로 유명하다. 사람들이 친절하기도 하지만 좀 순박하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몇 시간 후 그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을 온몸의 경험을 통해 인정할 수 있었다.


어플을 통해 예약한 숙소는 llirska ulica 17, 1000 Ljubljana, 슬로베니아에 있는 llirija 아파트다. 도심 중간에 위치한 이 숙소는 현지에서 직접 예약하기로 했던 우리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처럼 저렴하고 깔끔했다. 아직 빈방을 채우지 못한 숙소들은 할인가의 저렴하고 매력적인 가격을 제시하며 여행자를 유혹한다. 그리고 그런 숙소를 너무나도 쉽게 예약했다는 기쁨의 바이러스가 덮치기 전까지 그날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자동차 여행자인 우리는 구글 지도와 네비게이션을 온전히 의지했다. 그것이 우리가 잘못 입력한 곳일지라도... 분명 2km 이내로 확인했던 숙소의 위치가 27km로 바뀌어 있는 순간에도 그러했다. 전혀 무엇도 의심하지 않았던 우리의 밤은 필연이었을까? 밤 10시가 너머 도착한 숙소의 인포메이션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예약 어플을 보여주고 숙소 안내를 받으려고 하자 막 자다 나온 젊은 아가씨가 우리는 예약자가 아니라고 한다. 잠깐의 실랑이가 있어지만 우리의 여권을 걷어 가고는 이내 숙소를 안내해 주었다.  

Ribogojnica in Mhe Mihovc" Sandi Burkeljca s.p.(사진출처)

류블라냐에서 27km 떨어진 캄니크의 작은 마을 Zduša에 이렇게 동화 같은 숙소가 있을 줄이야... 그러나 아쉽게도 늦은 밤 도착한 우리는 이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없었다. 저 오두막 같은 숙소로 들어가기 위해 돌덩이가 실린 만큼 무거운 케리어를 끌고 까만 밤 불 빛 하나 없는 2층 숙소로 올라섰다. 모두 3명인 우리 일행은 순번을 정해 씻기로 하고 두번째 인 내 차례가 왔다. 드디어 씻을 수 있구나 하는 기쁨도 잠시 전기가 나가자 물도 끊겼다. 가까스로 욕실에서 나오고 나니 무언가 이상했다. 숙소를 잘 못 찾아온 것이다. 그제서야 예약한 숙소를 확인하고 부랴부랴 짐을 챙겼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이미 여권을 주인장에게 맡겼는데 돌려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지 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와 일행 한 명이 11시가 넘은 시간 인포메이션을 다시 두드렸다. 이번엔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가 나온다. 아무래도 젊은 아가씨의 어머니 인듯했다. 우리는 mistake와 I am sorry를 연신 외쳐가며 여권을 돌려달라 했다. 그녀는 쿨하게 이해했다고 한다. 그리고는 오히려 우리를 걱정하는 얼굴로 don't worry 하더니 잠시 안으로 들어가서는 우리 여권을 가지고 나왔다. 어떻게 하면 이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을까... 늦은 밤 잘못 찾아온 여행자에게 잠시나마 휴식할 수 있는 숙소를 내어 준 이 숙소는 우리에게 일체의 금전도 요구하지 않았다. 슬로베니아는 이런 곳이구나.... 감사한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다시 차에 올랐다. 

류블랴나 드래곤 브릿지

다시 27km를 돌아 류블나냐에 도착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너머 가고 있었다. 숙소에 도착한 시간이 너무 늦어서일까.. 이번엔 아무리 벨을 눌러도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 이제 힘도 들고 약간의 허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싶어 예약 사이트에 전화를 걸기로 하고 현지 연락처를 찾았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듯 한 예쁜 금발의 아가씨가 아파트 입구에서 우리와 마주쳤다. 이 때다 싶어 우리는 그녀에게 예약 사이트를 알려주고 도움을 요청했다. 불행하게도 슬로베니아에는 메이저급 예약사이트의 현지 연락처가 없었다. 전 세계에 현지 연락처가 있는데 어찌해서 슬로베니아만 없다는 것인가... 한 순간 좌절이 몰려왔다. 한국 상담원과 연락을 취하려고 하니 근무 시간이 아니라는 안내와 함께 영어로 상담을 받겠냐는 멘트가 흘러나온다. 시간은 벌써 새벽 2시로 접어들었다. 어쩔 수 없다. 안 되는 영어지만 그렇게 숙소 앞에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영어 멘트는 알아들을 수 있었고, 예약번호와 전화번호 입력으로 상담원과 연결이 되었다.    


대충 내용을 알아들은 것 같은 외국인 상담원은 숙소와 연락을 취해보겠다고 했으나 결국 주인과 소통 할 수 없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한국 상담원과 연락이 되려면 새벽 4시까지 기다려야 한다. 현지 시간은 새벽 2시 30분을 조금 넘기고 있었고 운전석과 뒷좌석에 있던 일행들은 지쳐 잠이 들었다. 무슨 정신으로 그 시간을 버텼는지 새벽 4시가 되자마자 한국 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상담원과 빠르게 연락이 되었지만 숙소 상황을 알아본 상담원은 우리 숙소가 무인 아파트라고 했다. 그랬다. 무인으로 운영되는 이 숙소에 주인이 있을 리가 없었다. 상담 직원은 숙소 이용 방법이 적힌 이메일을 우리에게 보내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숙소에 들어갔으나 끝나도 끝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주차다. 구시가지에 있는 우리 숙소는 주차장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제 주차만 하면 정말 끝이겠지? 동네 여기저기 주차시설이 잘 되어 있었지만 문제는 입차에 있었다. 대부분의 주차장에 입차 마감시간이 있어 들어갈 수가 없었다. 동네를 돌다 돌다 24시간 유료 주차장을 찾았지만, 입차를 마치고 나니 새벽 5시다. 이제 진짜 숙소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10여분을 걸어 가는 동안 우리는 류블라냐 구시가지 마을의 편안함을 느꼈다. 이른 새벽 드믄드믄 자전거로 산책을 하는 사람들과 동네를 돌아다니는 청소년들을 보았지만, 누구도 헤를 가하거나 겁을 주는 이는 없었다. 그야 말로 동유럽 중 가장 안전한 나라 인정!!


"그렇게 우리는 2019년 9월 30일 슬로베니아에서의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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