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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 Jan 31. 2019

여행의 시작.




일사천리로 수속을 마치고 돈므앙 공항을 나왔다. 푹푹 찌는 동남아의 습한 열기가 느껴졌다. 카오산로드로 가는 50밧짜리 버스를 타려다가 한 시간 반이 걸린다는 글을 보고 마음을 바꿔 택시를 타러 갔다. 공항 한쪽의 택시 정류소에는 사람이 북적였다. 테이블에 앉은 직원에게 목적지를 말하면 기사를 배정해주는 걸 확인하고 우리도 줄의 맨 뒤로 갔다. 배낭이 무거워 바닥에 내려놓고 순서를 기다렸다. 그 사이 남편은 뭔가를 검색해보려다가 휴대폰을 떨어트렸다. 급히 휴대폰을 주워보니 액정 한쪽이 깨졌다. 여행 직전에 바꾼 휴대폰이라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남편의 얼굴에도 순간 짜증이 비쳤다. 그제야 조금 여행이 실감 났다. 두 달 동안 사이좋게 잘 지내며 여행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남편과의 가장 길었던 여행은 2주 정도였다. 2달 동안 매 순간 함께 한다는 게 어떤 일일지 예측할 수 없었다. 속으로 걱정을 하며 남편의 기분을 살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남편은 금세 씩씩하게 '남은 여행 동안 편히 쓰고 한국 가서 고치면 되겠다.'하고 말했다. '그래, 차라리 편하게 쓸 수 있겠다'하고 맞장구를 쳤다.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예약해둔 숙소가 있는 파아팃 로드로 향했다. 깨끗하고 저렴한 곳을 찾아 예약한 숙소는 기대보다 더 좋았다. 객실의 청결도도 좋았지만 방 한 편의 창문과 넓은 욕실이 마음에 들었다. 창문 밖 전선 위로 매일 다람쥐들이 지나다녔다. 숙소의 뒤쪽으론 파아팃 선착장이 있고 길 건너에는 유명한 국숫집도 있었다. 짐을 풀고 내려가 본 선착장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파아팃 선착장



다람쥐가 지나던 숙소의 창 밖









본격적인 여행의 첫날엔 올드타운의 사원과 왕궁을 둘러보기로 했다. 아침 일찍 파아팃 선착장으로 가 왓 아룬으로 가는 배에 탔다. 주황색 깃발을 꽂은 배는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손님을 태웠다. 짜오프라야강을 따라 운행하는 운하 버스다. 손님이 타고 내릴 때마다 직원들이 배를 줄로 고정하고 풀었다. 배를 타고 얼마 가지 않아 왕궁과 사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왓 아룬에 도착 해 허리에 두를만한 긴 스커트를 하나 사고 사원을 구경했다. 멀리서 보는 것보다 더 예쁘고 아기자기한 사원이었다. 사원의 규모가 크지 않아 둘러보는 게 힘들지는 않았는데, 아직 아침을 먹지 않아서인지 날이 뜨거워서인지 금방 지쳤다. 남편도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툴툴거리는 투로 다른 사원을 둘러볼 거냐고 묻길래 그냥 숙소에 돌아가자고 했다. 허무맹랑하게 첫 번째 목적지를 미뤄두고 숙소로 돌아와 밥을 먹고 한숨 잤다. 푹 쉬고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둘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남아있었다. 더위가 가신 밤엔 방콕의 유명 야시장에 갔다. 현지의 젊은이들과 여행자들이 섞여 야시장 근처 역에서부터 북적였다. 야시장을 향해 걸어가는 도중 현금인출기가 눈에 띄었다. 한국에서 만들어 온 인출카드를 시험해 볼 생각에 인출기로 가 카드를 넣었다. 바트를 좀 뽑아서 여행 중에 입을 편한 옷이나 귀여운 것들을 살 생각을 하며 비밀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인출기는 카드를 뱉어냈다. 영문을 몰라 그 자리에서 몇 번을 더 시도했지만 계속 출금을 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비밀번호를 4자리로 만들었는데, 동남아에선 6자리를 입력해야 해서 뒤에 00을 붙여야 한다느니 앞에 00을 붙여야 한다느니, 확실하지 않아 이것저것 해보다가 결국 카드가 막혀버렸다. 나는 허둥지둥했고 남편은 불안해했다. 인출도 못하고 기분만 상해버렸다. 남편은 당장 쓸 바트는 있으니 일단 야시장을 구경하자고 했다. 야시장은 화려한 조명으로 반짝였고 근처 높은 건물에서 본 야시장은 알록달록 귀여웠다. 야시장 내부에는 각종 먹거리와 옷이나 소품등이 구역별로 나눠져 있었다. 곳곳에서 한국어도 눈에 띄였다. 번역기로 돌린 어색한 문구가 프린트되어 붙어있기도 하고 비속어나 줄임말도 곳곳에서 보였다. 사람들로 가득 차 수선스러운 야시장을 둘러보며 간단히 요기를 하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은 인출카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괜히 필요하지도 않은 돈을 뽑아보자고 해서 기분만 상하고 고민만 늘어난 데다가 하루 종일 썰렁했던 분위기를 더 차갑게 만들어 버린 것 같아서 속상했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어플로 정지된 카드의 비밀번호를 바꾸고 숙소 근처 현금 인출기로 향했다. 6자리가 아닌 4자리만 눌러도 된다는 정보를 보고 바꾼 비밀번호를 다시 눌렀지만 이번에도 안된다. 환율이나 수수료면에서 훨씬 좋은 카드를 만들었다며 호언을 했는데, 사용이 안되니 답답하고 속상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행 시작부터 꼬이는 것 같아 불안하고 초조했다. 나와 남편 사이도 여전히 냉랭했다. 한참을 검색해본 뒤에야 잠을 잘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카오산로드를 걷다가 보이는 다른 인출기에서 다시 시도를 했다. 여행객으로 보이는 사람이 막 인출을 끝낸 기계였다. 인출기 앞에서 카드를 붙들고 제발 제발 하고 속으로 외쳤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에 힘을 주고 꼭꼭 눌렀다. 그리고 인출기가 현금과 카드를 뱉어내니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어제 하루 종일 마음고생한 게 억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편도 나도 마음이 편해져서 전날과는 다른 분위기로 하루를 보냈다. 그 후로 대부분의 인출기에서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사용했고 방콕에서처럼 둘 사이가 냉랭한 적도 없었다.








65일간 남편과 동남아로 떠났습니다.

다녀온 뒤 여행지에서 쓴 일기를 보며

다시 그리고 썼습니다.


instagram @lllhay_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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