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예술종합학교 신문 기고문, 2018.10.14)
나는 책읽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친구들과 나의 관심사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게임이나 축구에 대해서 말하는 걸 좋아했고, 그런 친구들과 적당히 어울렸다. 그래서 인문학적 유희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절반쯤 다녔을 때 관심은 자연스럽게 예술로 전이되었다. 하지만 이미 인문계 고등학교의 이과로 진학한 상태였고, 예술분야로 진학할 수 있는 경로는 다양하지 않았다. 그저 이과에서 전공을 선택한다면 인문학과 공학, 예술의 교집합이라는 건축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건축과를 알았고, 입학했다.
대학생활은 더없이 즐거웠다. 선망하던 학문을 자유롭게 향유하는 시간이었다.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현상의 이면을 보는 즐거움을 알았다. 더불어 예술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까이에서 접하며 이해하게 되었다. 이들은 남들보다 조금 빨리 자신을 알고, 선택에 주저함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자신과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깊이 도취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꿈의 지속기간은 콩깍지(도취)가 얼마나 두꺼운지에 따라 결정되었고, 콩깍지가 충분히 두껍지 않은 사람은 갑작스럽게 현실을 마주했다. 누군가에게 현실은 예술을 ‘밥벌이라는 숙명’ 앞에서 작아지게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학창시절의 나에게도 내가 좋아하는 일에 대한 나만의 콩깍지가 있었다. 그러나 졸업이 다가오자 나의 콩깍지가 벗겨졌다. 밥벌이라는 현실에 직면하자 한 가지에 몰두하기 어려웠고, 막연한 미래가 두려웠다. 결국 나는 두려움에 도망쳤고, 건축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이 때 어떤 죄책감과 상실감을 느꼈다. 죄책감은 엘리트 예술인 양성을 목표로 하는 국립대학에서 세금의 지원으로 공부했던 자의 감정의 발현일 것이고, 상실감은 오랜 시간 열정을 쏟아서 공부한 것들이 무용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어느덧 졸업하고도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여전히 삶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배운 것의 도움을 받고 있다. 전공인 건축을 예로 들면, 건축은 목표를 정하고 배경지식을 습득하여 논리를 구축하는 것으로부터 작업이 시작된다. 그리고 전략과 단계별 실천계획을 수립하며, 구조·설비·조경 등 유관분야의 전문가와 협업한다. 이러한 설계의 과정은 회사에서 겪은 업무 절차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학창시절에 ‘작업의 완결’을 여러 차례 수행했던 경험은 회사 생활에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또한 예술기관에서 일하는 나에게 필요한 ‘좋은 공연과 전시를 분별하는 소양’과 여행에서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즐기는 방법을 학교에서 배웠다. 삶의 여유와 행복을 찾는 방법도 학교에서 배웠다.
선배들은 먹고 사는 문제를 고민하지 않거나 고민을 숨겼었다. 학문을 추구하고 예술을 고민하는 자는 처절한 자기희생과 배고픔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방법으로 먹고 사는 방법도, 먹고 사는 일의 숭고함도 배우지 못했었다. 혼자서 부딪히고 다쳤다. 하염없이 헤매느라 필요 이상의 시간을 소모했다.
이제 꽤 많은 후배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내게 묻는다. 회사원으로서의 삶에 대해서 묻고, 자신의 졸업 후 진로에 대한 상담을 요청한다. 이런 친구들에게 지난날의 내가 보인다. 전공한 분야를 포기하기로 결심한 순간 느꼈을 두려움, 가족과 친구,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 같은 감정이 내게 전달된다. 그러나 조금 빨랐던 우리들의 선택은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고, 우리가 배운 것들은 여전히 의미를 갖고 있다.
무대의 주인공이나 전시장의 작가만 예술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에 참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문화·예술분야의 회사와 기관에서 일하거나 (예술과 상관없는 회사를 다니더라도)예술을 후원하고, 적극적으로 즐기는 방식으로 예술을 지원하는 방법도 있다. 우리가 배운 것은 공연과 전시로 대유되는 예술의 결과물을 만드는 요령이 아니다.
누군가는 예술로 밥벌이를 하고, 누군가에게 밥벌이는 예술일 수 있다.
수단에 얽매이기 보다는 ‘JOSEPH BEUYS‘의 ‘모두가 예술가’라는 슬로건처럼 삶이 예술이 되는 우리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