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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훈 Mar 20. 2020

코로나19와 광기의 시대

ⓒ 연합뉴스 / 2020.2.23.

1월 말, 국내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약 2개월이 지났다. 이 기간 동안 언론에선 경마를 중계하듯 코로나19의 검진자와 확진자 숫자를 실시간으로 보도했다. 실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바이러스는 통계를 가장한 유언비어와 함께 죽음의 그림자처럼 다가왔고, 갑작스러운 공포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바꿨다. 최근 보거나 들은 사건들은 믿음보단 의심으로 가득한 도시의 풍경을 보여준다.


나의 경우 출퇴근 시 대중교통 이용을 포기했다. 코로나19 확산 초기 버스와 지하철에서 기침을 했더니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고개를 돌려서 나를 쳐다봤고, 날카로운 경계의 시선을 느꼈다. 출근 시간 내내 간헐적으로 새어 나오는 기침을 참아야 했고, 다음날부터 자가용으로 출근했다. 아이들이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미세먼지 저감에 동참하고자 대중교통을 이용한 지 일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선 팔꿈치와 무릎으로 버튼을 누르는 기이한 광경을 볼 수 있었고, 식당에선 문손잡이를 잡지 않으려고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상대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확진자의 동선은 재난문자로 지역주민 전체에게 신속하게 공개되었으며 개인의 사생활은 여과 없이 드러났다. 공개수배로 전환된 어느 범죄자의 동선도 이렇게 뜨거운 관심을 받은 적은 없다. 나의 건강을 위해선 타인과 타인의 흔적을 의심하는 것이 일상화되고 있었다.


방송에선 박쥐를 먹는 중국의 식문화가 바이러스 확산의 원인이라는 가설에 불과한 내용이 사실처럼 보도되었다. 개를 먹는 한국 식문화가 외신에 비난받을 때 분노하던 사람들은 앞다투어 중국의 식문화를 비난했다.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은 질병의 발원지인 중국을 국적으로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일자리를 잃고 배척당했다.

서양에선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처럼) 한국인을 포함한 동양인들이 질병의 전파자 취급을 받았다. 이스라엘 숙박업소에선 한국인의 투숙을 거부했고, 이탈리아에선 유학생이 중국인이라는 이유로 폭행을 당해 피투성이가 됐다. 미국에선 지하철에서 동양인 남성에게 섬유탈취제를 뿌리는 서양인의 모습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세계 각국은 경쟁적으로 타국민의 입국을 거부했고 다양한 국적의 여행객을 태운 크루즈선은 길을 잃은 아이처럼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바다를 떠돌았다.


일련의 사태를 경험하면서 서로에 대한 암묵적 믿음이라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달았다. 우리는 지금까지 서로의 거리나 호흡을 신경 쓰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간과 시설물을 의심하지 않고 생활했다. 국적과 인종의 다름이 여행의 장애물이었던 적도 없다. 그러나 최근 생경한 불편함을 경험하고 있다. 바이러스의 불안과 공포가 선동과 의심, 혐오와 배척으로 이어졌고, 서로에 대한 믿음이 사라졌다. 자신을 제외한 타인은 잠재적 보균자로 간주되고 이기심과 인종차별은 질병의 예방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고 있다. 이기주의와 국가주의, 인종차별이 만연한 광기의 시대다.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깨닫지 못하는 ‘무사유(thoughtlessness)’가 악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지의 바이러스 출현이 안겨준 불안과 공포는 우리의 말과 사고를 제어하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사유는 자연스러워졌고 자기 보호의 벽은 단단해졌다. 당연한 의구심과 건전한 비판은 과잉대응이 타당하다는 방역 원칙에 따라 불온(不穩)이 되었다.


세계보건기구에서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pandemic)을 선언했고, 우리는 질병과의 기약 없는 투쟁을 예정하고 있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우리의 싸움으로부터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선 대처 방식이 지속 가능해야 한다. 지금까지 ‘타인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식’으로 자기 방역을 해왔다면, 이제부터 ‘남을 지켜주는 방식’의 이타적 방역이 필요하다. 믿음을 바탕으로 연대하여 질병에 맞선다면 당연하게 누려왔던 일상을 회복할 수 있다. 늘 그랬듯 터널의 끝에는 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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