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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훈 Dec 15. 2020

2020.10 - 2020.12

분기별 일기

2020.10.05.

마치 숙명처럼 매일 운동하고 논문을 쓴다. 치열하게 사는 것을 경계하지만 부지런한 것을 동경한다. 최종 심사가 다가올수록 논문이 끝난 이후 맞닥뜨릴 공허함을 걱정하고 있다.



2020.10.12.

출근길에 늘 마주치는 환경미화원이 있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지점에 보인다. 안 보이면 걱정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로 정이 들었다. 거리의 풍경조차 빠르게 변하는 시대다. 변하지 않는 것들을 좋아한다.



2020.10.22.

“이제부터 내 인생의 목적은 이 소녀를 공포로부터, 악으로부터, 인생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이라 생각했다.”라는 문장을 다이어리에 적어뒀는데, 출처가 기억나지 않는다. 앙드레 지드, 혹은 헤르만 헤세의 책을 읽다가 메모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공포와 악, 그리고 인생이 병렬적으로 나열된다는 것이 아찔하게 느껴져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2020.11.07.

“낚시하고 밭을 일구듯이 글을 쓴다. 그물을 던지면 고기가 잡히던 시절이 지나면 농사를 하듯이 밭을 일궈야 글이 써진다.”라고 어느 강연에서 김애란 작가가 말했다. 익숙함이 능숙함과 편안함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착각이었다. 아직 멀었다.



2020.11.12.

무라카미 하루키는 서른세 살부터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그의 책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밝혔다. (공교롭게) 나도 서른세 살부터 운동을 시작하여 아직까지 꾸준하다. 운동을 시작하고 이 년째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운동하고 혼자서 밥을 먹는다. 휴일이나 운동을 거른 날엔 집에서 운동한다. 식단 조절 없이 체중 10kg, 체지방 18%를 줄였다. 매일 일정 시간을 운동하며 보냈지만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은 늘어났다.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 줄었다.

성경에 “사탄이 틈탄다.”라는 문구가 있다. 위태로운 의지는 유혹에 취약하여 작은 변수에도 흔들린다.



2020.11.17.

한 때 시간이 가는 것이 마냥 두렵고 덧없게 느껴졌다. 요즘은 때때로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2020.11.25.

나를 보면 중세의 수도사가 떠오른다는 말을 들었다. 놀랐다. 가끔 스스로 (수도사와 비슷한) 등대지기나 산지기가 되면 어땠을지 상상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면이 외부에 추측보다 높은 확률로 굴절 없이 발현된다고 느꼈다. 에드문트 후설은 저서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에서 “철학은 인간의 자기 성찰이고 이성의 자기실현”이라고 했다. 부끄럽지 않은 외면을 위해서는 조금 더 읽고 쓰는 수밖에 없겠다.



2020.12.10.

논문 최종 심사가 끝났다. 회사 업무에 소홀함 없이 (일반대학원, 특수대학원이 아닌) 전문대학원 과정을 졸업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서울대학교의 경우 환경대학원과 더불어 의학대학원, 법학전문대학원, 경영전문대학원, 국제대학원 등의 전문대학원이 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고 논문을 쓰는 기간 동안 스스로의 부족함을 서글프게 깨우쳤다. 학교는 시대적 흐름에 기민하게 반응하고 있었고, 변화하는 속도에 비해 나는 얼마나 정체되어 있는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열려있고 싶다. 공부하고 싶다.



2020.12.14.

조금 전 신형철의 책,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중 '아포리즘에 대하여'라는 꼭지의 글을 읽었다. 짧은 문장이 지니는 나름의 가치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역설적이게도 이 글을 읽으며 분기별 일기는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짧은 글을 읽고 쉽게 판단하거나, 짧은 글을 써서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쓰지 않고 사는 것에 대한 죄의식과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무사유를 경계하기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혼자서 끄적거리는 메모를 갈무리하는 수준에서라도 규칙적인 글쓰기 습관을 만들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적당한 책임감을 부여하기 위해 분기에 한 번씩 브런치에 게시하겠다는 소박한 목표를 정했다. 또한 분기별 일기의 최소 단위이며 일 년에 해당하는 네 번의 게시물을 숙제하듯이 올렸다.

이 기간 동안 (아무도 부여한 적 없고, 검사하지 않는 숙제에 대한)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았고, 스스로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기를 쓰기 위해 출퇴근길 운전하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신호등에 걸렸을 때) 휘갈기듯 메모장에 남기게 되었는데, 소기의 목적이었던 글쓰기 습관은 달성한 셈이다.

(마무리 과정이 남았으나) 논문이 끝났고,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다가오는 시간과 대면할 준비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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